화살표와의 이별, 섬세함과의 만남

생각의 서고 45화

by 소는영

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언젠가 죽는다.


1.

‘삼단논법’으로 불리우는 연역적 논리 체계의 대표적 예시로, 이를 사용할 때마다, “죄 없는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생멸(生滅)을 반복하고 있다. 여기 다시 언급한다는 게 조금 미안할 따름이나, 그를 다시 부활시킨 것은, 본 글의 제목에서 ‘화살표’를 설명하고자 함에 연유한다.



2.

여기서 쓴 ‘화살표’는 “→” 로 방향을 내포한 기호다. 이때의 방향은, 현상에서의 동서남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연역적 사유에 필요한 도구로서, [필연성, 함축, 당연시] 와 같이 엮이는 표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위의 예시를 화살표를 이용해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 → 언젠간 죽음’


화살표로 설명한 연역적 기호 표현의 단순화. 물론 그가 화살 맞고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3.

연역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연역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대전제, 소전제는 [사전에 정해진 프로세스 및 구조적 프레임]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 중 하나로 구태여 ‘소크라테스’여야만 하지 않고, 당장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상관없다. 누구든지, 저 예시에서 인간에 속하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언젠간 죽는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 부분에 집중하여 논의할 경우, ‘사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지에 관해선 다소 회의적이다. 내가 연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누구든지] 사람이기만 하면 언젠간 죽는다는 것일 뿐 그 외의 가능성에 관해선 저 논제만으론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된 문장이 [적실성을 갖춘 논거]라면, 결론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되지 않는다. 불확실한 세계 속, 어떤 것보다도 확실성을 담보하는 존재로서 연역은 실존한다.



၅၎


4.

세계는 확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 나의 기분이 좋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어디까지나 사후적으로 관찰될 수 있을 뿐이다. 과거형인 ‘-았’, ‘-었’이 쓰인 이유도 그런 점에서다.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지, 안 좋은 일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



5.

사고 또한 모든 경우에 똑같이 이뤄지지 않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정해진 매커니즘에 따라, 별도의 고찰 없이 자동기계처럼 행동한다. 그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사고는 모든 경우에 똑같이 이뤄지지 않는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정해진 매커니즘에 따라, 별도의 고찰 없이 자동기계처럼 행동한다. 그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복잡하고 일회성에 그치는 삶의 순간들 앞에서, 우리가 그토록 신뢰했던 '화살표'는 무기력하게 꺾이곤 한다.



6.

현실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전건(연역에서의 앞 조건을 지칭한다)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결론이라는 과녁에 화살이 명중하는 것은 아니다. 공들여 준비한 시험, 진심을 다한 고백, 치밀하게 계획한 프로젝트라는 '전건'들은 종종 예상치 못한 '후건'으로 우리를 배신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인 의문에 직면한다. 현실에는 애초에 화살표 같은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화살표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숨은 전건'들을 우리가 다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7.

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삶은 논리학의 영토가 아닌 확률과 혼돈의 영토다. 논리 기호 속의 화살표는 진공 상태의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가설일 뿐, 마찰력과 변수가 가득한 현실에선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약속일지도 모른다.


반면 후자의 관점, 즉 '발견되지 않은 전건'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조건 외에도 산소의 존재, 생화학적 반응, 혹은 독배라는 구체적인 변수들이 화살표 위에 촘촘히 박혀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화살표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단지 하나의 조건만을 보았을 뿐, 그 뒤에 숨은, 아니 숨겨진 무한한 변수들을 미처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화살표와의 이별'을 준비하려 한다. 그것이 전건의 결핍 때문이든, 세계의 본질적 불확실성 때문이든 중요하지 않다. 화살표에 매몰된 삶은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늘 '조건부'의 삶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건이 충족되었으니 마땅히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강박은,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우리를 자책과 허무의 늪으로 빠뜨린다. "왜 화살표가 작동하지 않았을까?"라며 과거의 전건을 복기하는 동안, 현재라는 생생한 현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9.

화살표와 이별한다는 것은 결론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불투명성을 껴안겠다는 선언이다. 전건을 충족시켰음에도 후건이 따라오지 않는 '논리적 오류'의 순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연역적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우연과 마주하는 경이로운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방향이 정해진 화살표가 아니라,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점(點)들의 집합이다. 필연의 세계에서 내려와 불확실한 대지 위에 서는 것. 그리하여 다음 문장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펜을 꾹 눌러 쓰는 것. 그것이 내가 화살표를 떠나보내며 맞이하는 진짜 삶의 논법이라 생각한다.





ܜၐဩ2026.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