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된 '나'와 본래의 "나"

생각의 서고 6편

by 소는영

0.


'이성(理性)'을 반대로 읽으면 '성리(性理)'가 된다. 일견 언어유희처럼 보이는 전도(顚倒)는 단순히 단어의 순서를 바꿔 도출한, 유쾌한 말장난이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 당신께서 던지신 화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걸, 자식된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앞뒤바꿈의 의미가 1픽셀만큼 단지 사소한 깊이가 아닌, 크레바스마냥 심오(深奧)하다는 것을, 별 것도 아닌 거마냥 섣부르게 시작한 사색은 아연실색으로 종착하였다.



1.


현실에서 이성(理性, ratio)은 주로 분석하고, 판단하며,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 세계를 객관화하고, 현상을 명확한 개념으로 구분하며,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주체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작금의 서양을 비롯하여, 현대 사회를 건설하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으로서 이성은 화려한 위상을 자처한다.


이와 달리, 동양의 수행 전통에서의 성리(性理)는 '본래의 성품(性)'과 '우주의 이치(理)'의 합일을 뜻한다. 여기서의 성(性)은 시비(是非), 고락(苦樂)의 분별에 물들기 이전의 청정한 본성, 즉 불성(佛性)이나 참된 나 가리킨다. 리(理)는 우주 만물이 움직이는 궁극적이고 변치 않는 질서, 즉 연기(緣起)의 법칙과 같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참된 성품은 결국 우주 하늘과 땅과 바다의 이치와 같은 것"이며, 이때 이치에는 "분별심과 그 결과로 인한 주착심(執着心)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실의 '나'는 일상에서 '이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과 깨달음은, 복잡하게 얽힌 외부 세계를 분석하는 이성을 잠시 내려놓고, 그 이성의 근원인 성품, 즉 성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나로 하여, 단어의 전도가 보여주는 역설의 맥동(脈動)을, 간접적이나마 생경(生警)하게 만들었다.



2.


인간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덫에 빠져, 분별심, 주착심, 탐욕, 분노 등으로 물든다. 그 결과 거짓된 나, 예를 들어 참된 성품이 아닌 내 몸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좋은 옷 입고 싶다고 조르는 놈, 맛있는 음식 먹고 싶다고 조르는 놈, 그리고 어리석은 생각을 내는 놈이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


불교에선, 이를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 혹은 끊임없이 작동하는 번뇌(煩惱)의 형상으로 표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보통의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몸(色)과 느낌(受), 표상(想), 의지(行), 인식(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서 만들어낸 허상인 것이다.


이 오온이라는 놈은 가만히 있질 않고, 늘상 변한다. 특히 느낌, 표상, 의지, 인식은 끊임없이 희로애락애오욕(七情)과 탐진치(貪瞋癡)라는 세 가지 독(三毒)에 물들어 분별심과 주착심(집착)을 낳는다. 그런데 탐진치가 뭐길래 독에 비유하는 걸까?


탐욕(貪, 탐심)이란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더 많은 돈, 명예를 원하는 마음이다. 분노(瞋, 진심)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고 성내는 불만족의 마음이다. 그리고 어리석음(癡, 치심)이란, 모든 것이 영원하거나, 일상에서 마주한 '거짓된 나'를 '참된 나'라고 착각하는 근본적인 무지(無明)를 뜻한다. 이때 '거짓된 나'는 마치 덧칠된 페인트처럼 참된 성품(참된 나)을 가리고, 끝없이 욕망의 충족을 요구하며, 나를 끌고 다닌다.


일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도, 이 '거짓된 나'는 끊임없이 나의 마음속에서 [좋다, 싫다, 나의 것이다, 남의 것이다를 따지며] 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행이라는 건 결국 '거짓된 나'가 휘두르는 주착심의 채찍에서 벗어나, 덧칠된 페인트를 걷어내고 그 아래 묻혀 있는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3.


사계절이 변하는 원리로서, 음양상승에 의한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언명은 연기(緣起)와 공(空)의 관념과 상이(相異)하지 않았다.


음양상승(陰陽相勝)은 우주 만물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교류하며 변화하는 원리로, 겨울의 극한에 달했을 때 이미 봄의 기운(양)이 싹트고, 여름의 절정에서 가을의 기운(음)이 자라나듯, 세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변화하며 순환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이 순환의 법칙을 인간의 삶과 행위에 적용한 것이 바로 인과보응(因果報應)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카르마)의 법칙은, 내가 지금 심는 인(因, 씨앗)과 그 인이 다른 조건들(연, 緣)과 만나 만들어내는 과(果, 결과)로 구성된다. 이때의 순환은 어떤 권능 있는 신의 개입 없이 스스로 작동한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어떠할 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의 리(理)에 의하면, 착한 씨앗을 심으면 선한 결과가, 악한 씨앗을 심으면 괴로운 결과가 돌아온다고 확언하고 있다. 이 시각에 따르면, 전지전능존재가 우리를 벌하거나 상 주는 것이 아닌, 단지 만물의 상호의존적인 작용 원리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나아가, 이 모든 변화의 과정은 그 자체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한다. 이때 불생(不生)이란 어떤 것도 홀로 완전히 새롭게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 잠시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멸(不滅)은 어떤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이 다하면 모습이 변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것의 부산물에 불과함을 함의한다.


정리하자면, 내가 겪는 고통과 즐거움, 성공과 실패 모두 이 불생불멸하는 인과보응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던 것이다.



4.


만약, 나도 그 흐름의 정체를 몸소 깨우쳐 비로소 알게 된다면, 언젠간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거짓된 나'에서 탈피하여 본래의 성품을 지닌 '참된 나'를 보는 것, 단순히 머리로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는 지적인 깨달음(解悟)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으로서, 나의 존재 깊숙한 곳에, 본래부터 분별심과 주착심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성품(性)을 직접 체득(證悟)하는 경험으로서, 나는 과연 견성(見性)과 마주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가진(아니면 가졌다고 착각한)어줍잖은 논리철학이나 개념법학에서 접한 어설픈 이항대립부터 시작하여, 시비, 고락, 호불호 등 모든 이분법적 사고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리고 세상 만물이 좋고 싫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연기의 작용일 뿐임을 알게 된다면, 분별심의 해체에 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의 것', '영원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집착이 사라진다면 주착심의 소멸로 볼 수 있을 것이요, 괴로움의 근원인 탐진치 삼독의 힘 또한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 라는 존재가 우주의 불생불멸하는 인과보응의 이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체득(마치 파도가 바다와 다르지 않음을 알듯이)한다면, '나'의 성품(性)이 곧 우주의 이치(理)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도 언젠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현현(顯現)을 직접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견성 이전에는 산과 물을 나의 감정(좋다/싫다)과 이성(분석/판단)의 필터를 통해 바라보았다면, 견성 후에는 그 모든 덧칠을 걷어내고 산은 있는 그대로 산이고, 물은 있는 그대로 물인 청정한 실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5.


오늘 하루도 나는, 수많은 감정과 욕망, 즉 '거짓된 나'의 소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아버지 당신께선 분명 나보다 먼저 경험하시고 깨달으셨으니, 아버지 당신보다 어리석은(愚) 나로선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자명하다. 이 문장에서조차 시비, 분별을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그런 경험은 부지불식간에 계속될 것이다. 힘들어서 모든 걸 놓고 싶을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사소해도 괜찮으니, 한번씩 견성을 곱씹어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적어도 고민은 고민일 뿐, 나는 "나"라는 걸 잊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2025.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