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25화
인류의 지성사는 오랫동안 '나(自)'와 '남(他)'이라는 두 실체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골몰해 왔다. 서구의 근대 윤리학, 특히 홉스로 대변되는 이기주의적 인간관과 칸트로 대표되는 의무론적 이타주의는 인간의 행위 동기를 자기이익과 타인이익이라는 대립적인 축으로 양분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도는 필연적으로 "나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 당위를 위해 나를 희생할 것인가"라는 제로섬(Zero-sum)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어버리는데, 본고는 이러한 윤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3의 길로서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사상을 조명하여, 자리이타가 단순한 호혜적 윤리 강령을 넘어 존재의 실상(實相)에 부합하는 존재론적 결론임을 논증할 것이다.
우선 자리이타의 철학적 근거인 연기(緣起)와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에서 출발하여,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황금률의 진화, 유식학(唯識學)적 분석을 통한 이타심의 심리 기제, 그리고 현대 사회의 생활 윤리 속에서의 구체적 실천 양상으로 논의를 확장할 것이다. 이를 통해 '현명한 이기주의'와 '적절한 이타주의'의 통합을 지향하는 불교 윤리의 현대적 가치의 발견을 도모하고자 한다.
불교 윤리로서 자리이타는 윤리적 당위 이전에 존재론적 사실에 기반하는바, 이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각 개념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를 전제로 하는 서구 윤리학의 근본 전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상이하다는 점에 연유한다.
일반적인 상식이나 서구의 개인주의 철학은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립된 실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는 이러한 고정불변의 자아 관념을 부정한다.
혹자는, 무아(無我)라는 이름에서 일견 허무주의로서 자기소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론은 자아의 허무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아를 세계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수만 개의 부품과 제조 노동, 도로 환경 등에 의존하여 비로소 '자동차'로 기능하듯이, 인간 존재 역시 타인과 자연, 우주적 조건에 의존하여 성립한다. 이를 연기(緣起)라 한다. 이 관점에서 타인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자 '확장된 나'의 일부가 된다.
'나'와 '남'이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라면, 타인의 이익(利他)을 도모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립 기반을 공고히 하는 자기 이익(自利)의 행위가 된다. 반대로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 기반을 파괴하는 자해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불교의 자리이타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돕는다"는 호혜적 전략을 넘어, "남이 곧 나"라는 존재론적 진실의 실천이 된다.
자리이타에서 말하는 '리(利)'의 개념은 단순한 물질적 획득이나 쾌락에 국한되지 않으며, 나아가 범부(凡夫)의 차원과 성자(聖者)의 차원으로 나뉘어 다층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범부, 즉 성자와 구분되는 대상으로서 일상적 생활을 이어나가는 모든 이들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그 이익은 현생의 안락, 재물, 명예, 건강, 그리고 내생의 복락을 포함한다. 불교경전은 타인을 해치지 않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긍정적인 과보로 돌아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서구의 공리주의나 홉스 식의 '계약적 도덕'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나, 그 근저에 삼세(三世)의 인과율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즉, 범부의 자리이타는 타인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복덕을 쌓는 '수평적 이익 확대'의 과정이다.
반면, 성자의 이익은 탐진치, 다시 말하자면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을 소멸하고 열반(Nirvana)에 이르는 궁극적 해탈을 의미한다. 성자에게 있어 진정한 '자기이익'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도달하는 자유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자비행(慈悲行)과 결합된다. 성자의 이타행은 복을 바라는 마음조차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이며, 이를 통해 존재의 차원이 범부에서 붓다로 도약하는 '수직적 이익 상승'을 이룬다.
황금률(Golden Rule)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를 너도 남에게 행하라"는 보편적 윤리 원칙이다. 불교 경전은 이 황금률을 단계적으로 심화시켜 제시한다. 본고에선 소분하여 2단계로 설명을 한다.
자기애(自己愛)의 긍정과 승화로서 첫번째 단계는 초기 불교 경전인 『상윳따 니까야』에 등장하는 '말리까 왕비와 빠세나디 왕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적 황금률의 심리학적 기초를 보여준다.
붓다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다"는 인간의 근원적 자기애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바,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애를 타인에게로 투사하는 추론 과정이다. "나에게 생명이 소중하고 고통이 싫다면, 타인에게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 황금률(Negative Golden Rule)의 기초가 된다. 맹목적인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자기 존중이 타인 존중의 전제조건임을 시사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타구리(自他俱利)의 이상이자 두번째 단계에선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타구리'를 최상의 덕목으로 제시한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자신도 타인도 이롭지 않게 하는 자,
타인은 이롭게 하되 자신은 이롭지 않은 자,
자신은 이롭게 하되 타인은 이롭지 않은 자,
자신과 타인 모두를 이롭게 하는 자
붓다는 이 중에서 네 번째 유형, 즉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자를 으뜸으로 꼽는다. 특이한 것은 타인만 위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유형(2번)보다, 자기를 위하고 타인을 돌보지 않는 유형을 더 수승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이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이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 아님을 방증하며, 자리와 이타가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대승불교, 그중에서도 인간 심리를 정밀하게 분석한 유식학(唯識學)은 이타심이 단순히 도덕적 당위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수행을 통한 인지 구조의 변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심리적 결과물임을 밝혀준다.
자리이타의 심리적 기제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작동하며,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최상의 길이 이타적인 사람이며, 그 행동이 자기에게 가장 큰 축복으로 돌아온다"고 역설했다.
성철 스님은 "남을 위해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고,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이타행이 타인을 위한 소모적 희생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의 번뇌(습기)를 정화하고 깨달음을 완성해가는(수습위) 필수적인 과정임을 의미한다. 타인을 돕는 행위 속에서 아상(我相)이 깎여나가고, 그 자리에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전통적인 윤리관에서 이기주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타주의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제윤의 연구와 불교적 관점을 종합해보면, 이러한 이분법은 현실적인 삶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불교는 '현명한 이기주의'와 '적절한 이타주의'의 조화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진 햄튼(Jean Hampton)이 제시한 '어머니 A'의 사례는 무조건적 희생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A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욕구와 건강을 희생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피폐해지고 가족에게도 죄책감이나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을 학대하거나 소외시키는 희생은 올바른 자비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에 대한 다른 형태의 무지이며, 자신을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자신의 불성(佛性)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이타행을 불가능하게 한다.
아인 랜드(Ayn Rand)는 이타주의가 개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희생만을 강요하는 파괴적인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불교는 이러한 비판의 일부를 수용할 수 있다. 맹목적인 자기부정은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랜드식의 배타적 이기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권위(self-authentic)'를 가진 주체로서의 자아를 확립하고, 그 충만함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길을 제시한다.
도덕적인 삶은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자신을 발달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인의식과 권위를 가진 사람만이 타인의 가치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모습을 선택하고 노력하는 과정(자기 이익 추구)은 타인과 단절된 고립이 아니라, 타인과 더 풍요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가 된다.
진정한 이타주의는 '자기상실'이 아니라 '자기 확장'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광풍 속에서 유대인을 구조한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 그들의 행위는 의무감에 의한 억지 희생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깊은 일체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Virtue)이나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와 맥을 같이한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타인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타인의 이익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경지, 이것이 바로 '현명한 이기주의'이자 '적절한 이타주의'이다. 이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칭송한 '자타를 모두 이롭게 하는 자'의 현대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본 보고서는 불교의 '자리이타' 개념을 철학, 심리, 윤리, 실천의 다각도에서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자리이타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극단적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적 희생 강요의 폐해를 동시에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첫째, 자리이타는 자기 사랑의 정당성을 회복시킨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을 학대하는 희생은 불교적이지 않다. 우리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自利) 건강한 자아를 바탕으로 타인을 포용해야 한다.
둘째, 자리이타는 상호의존성의 통찰을 제공한다.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은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증장시키는 윈윈(Win-win) 관계이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현명한 계산'은 범부에게도 유효한 삶의 지혜이며, 나아가 자타불이의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된다.
셋째, 자리이타는 지속가능한 실천을 담보한다. 의무감이나 당위에 의한 억지 이타행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서의 이타행을 지향한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치유하며 스스로 성장하듯,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자리이타는 "자신의 완성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의 구원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역동적인 순환 구조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역설의 진리야말로,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나침반이라 할 것이다.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연기)과 따뜻한 마음(자비)이 결합된 가장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기술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025. 11. 30.
안환기, 《자리이타의 불교 심리학적 의미》, 인문사회21, 『인문사회 21』제9권 제4호, 2018. 8., 1193-1206면
최제윤, 《적절한 이타주의와 현명한 이기주의》, 대동철학회, 『대동철학』제25호, 2004, 3., 233-256면
이은영, 《불교의 황금률 고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동아시아불교문화』제42집, 2020. 6., 263-2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