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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썬이 Jan 11. 2023

엄마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

무소음, 무자극의 시간


세 아이가 3일 만에 등원하는 월요일은 늘 분주하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제한된 시간 동안, 주말 내내 어질러진 집을 깨끗이 치우고도 약간의 시간을 남겨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일단 아이들을 별 탈 없이 최대한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첫째 아이는 내년이면 입학할 나이지만 아직도 주 1회는 등원 거부를 해서 날 애먹이는데, 안타깝게도 등원 거부는 내 시간이 가장 절실한 바로 그 월요일에 보통 찾아온다.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다행히도 첫째 아이가 열심히 준비하며 기다려온 어린이집 발표회가 있는 날이라 등원거부를 피할 수 있었다(어린이집, 감사합니다!).


혹한에도 유모차를 거부하고 우산 들고 걸어서 등원하는 23개월 쌍둥이와 누나


부지런히 아이들 등원을 마치면 집 안에 비현실적인 정적이 찾아온다. 나는 현실감 조정을 위해 잠시 멍을 때리다가 6컵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6컵이면 시중의 커피전문점에서 큰 사이즈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양의 에스프레소이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만 5년 반동안 나는 매일같이 새벽 5시를 전후해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나에게 새벽 5시는 여전히 부담스럽고 힘들다. 그래서 새벽 5시부터 아이들이 등원하는 9시까지 잘 버티고, 그 후에 얻는 소중한 내 시간에 다시 눕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려면 정신 번쩍 들게 해 줄 차가운 카페인이 필요한 것이다.


모카포트를 불 위에 올려놓고 장난감 정리를 한다. 지난밤에는 아이들이 깨지 않고 잘 자 주어서인지, 아님 내가 애들을 재우다가 일찍 잠들어서인지 지체 없이 집 정리가 진행됐다. 허구한 날 쏟고 묻혀서 끈끈한 놀이매트 위를 세정제로 닦다 보면 에스프레소 추출되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불을 끄고 여열로 남은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동안 냉동실에서 얼음 한 판을 꺼낸다. 보냉컵에 얼음 한 판을 모두 깨서 넣고 추출된 에스프레소의 반 정도를 부어주면 오늘의 첫 번째 아이스 아메리카노 완성. 방금 나온 신선한 커피에 대한 예의로 한 모금 호록 마시고 다시 집 정리를 시작한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장난감 수납함, 책상 위, 혹은 쓰레기통으로 모두 이동하여 마침내 마룻바닥 위에 아무것도 없어지면 그제야 내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거실 바닥을 가득 채운 초대형 놀이매트를 반으로 접고 로봇 청소기를 켜면 커다란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속으로 '이제 내 시간이다!'라고 외친다. 결혼해서도 애 낳기 전까지는 이렇게 집정리에 목매지 않았었는데 애가 셋이 되니까 갑자기 깔끔을 떨게 됐다. 무서운 속도로 끊임없이 어지르고 다니는 꼬마 파괴자들로부터 내 집을 빼앗길까 봐 두려운 것일지도.


막상 내 시간이 되어도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특별한 계획은 매우 드물게 생기고 대부분의 경우 집에서 홀로 적막을 즐기는 편이다. 나의 MBTI 유형이 INFJ라서 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대학교 때, 그리고 회사생활을 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단조롭고 뻔한 것을 싫어해서 항상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을 찾아다녔다. 술모임도 좋아하고 시끄러운 공연장과 클럽도 즐겨 갔다. 결혼을 하고 미국에서 잠시 살았을 때도 해변에 서핑을 배우러 다니고 굳이 동네 마트가 아닌 여러 지역의 파머스 마켓을 찾아다녔던 나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터 왜 집순이가 된 것일까?


쌍둥이를 출산하고 집에 돌아온 직후의 상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신생아 쌍둥이와 보내던 밤들은 예상보다도 더 가혹했다. 한 녀석이 자다가 깨서 울면 우유를 먹이고 다시 토닥거려 재워서 눕히는데, 나도 눈 좀 붙일까 하면 다른 녀석이 깨서 울었다. 그럼 또 우유를 먹이고 토닥거려 재우고 또 잠 좀 잘까 하면 다른 녀석이 울었다. 어떤 날은 두 녀석이 동시에 깨서 우는데 우유를 같이 먹이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을 울릴 수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소리에 예민한 첫째까지 깨서 울기도 했다. 아이 울음소리처럼 견디기 힘든 소리가 또 있을까. 나 역시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라 밤새도록 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쌍둥이가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중간에 깨지 않고 자는 날도 제법 많아졌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한집에 세 아이가 살면 과다 자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울고,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르고, 뛰어다니고, 다치고, 싸우고, 그러다가 또 울고. 그것뿐인가. 나 역시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훈육, 교육, 놀이라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말해야(소리 질러야) 한다. '사랑하는 아이들이니까 그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해야지'라는 의무감조차도 나를 버겁게 하는 정신적 자극이다. 자극이 허용치를 초과하면 자꾸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나고 무기력해진다. 그렇기에 내 삶, 내 감정의 밸런스를 위해서 무소음, 무자극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세 아이가 하원을 하면 다시 바쁜 일과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면 엄청난 과업이라도 해낸 양 안도하며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이들이 주는 과자극 속에 자발적으로 나를 내던져 나 역시도 그 일부분이 되어본다. 내가 '과자극'이라고 폄하한 시간이 사실은 부모자식 간의 교감을 통한 애착육아의 시간임을 머리로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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