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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Sep 26. 2024

끊어질 인연만 있는 건 아니야

유럽에서는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는데, 한 달이 지나 돌아온 한국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열대야에 시차적응 문제로 밤을 꼴딱 새웠다. 덕분에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지난 시간을 회고할 수 있었다. 수백 장의 사진이 있었지만, 손가락질 몇 번 만에 그간의 추억이 모조리 스쳐갔다. 한 순간이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엄마가 일어나시길래 기억에 남는 사진을 몇 가지 추려 보여드렸다.


부다페스트 도착한 날 밤에 민박 사장님이랑 산책을 했거든. 이 나라 사람들은 주말 저녁이면 광장에 모여서 춤을 추더라. 낭만적이지?

이건 룸메이트랑 먹은 슈바인학센인데 너무 느끼해서 결국 남겼어, 우리나라처럼 치킨무도 안 주더라고.

이날부터 갑자기 추워져서 룸메이트랑 쇼핑했는데 아무것도 못 샀어. 기온이 하루 만에 10도 넘게 떨어지더라.

알프스 정상에 산장이 있었는데, 동행들이 맥주 한 잔 씩을 먹는 거야. 그래서 나도 따라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었어. 레모네이드 맛이랑 똑같아.


여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에는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과의 일화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절경의 자연일지라도, 화려한 예술품을 보았을지라도, 오감을 만족시키는 음식이라도, 심금을 울리는 공연이더라도, 종국에는 사람이었다. 혼자 여행을 떠난 것 치고는 머릿속이 사람으로 가득하니, 진정 나홀로여행을 좋아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홀로여행이 좋은 건 맞다는 결론.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의 조화를 마음껏 조율할 수 있는 게 나홀로여행의 최대 장점이니까. 이 외에도 나홀로여행의 장점은 차고 넘친다. 동시에 한 가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유’.

나홀로여행의 필살기.

이 맛을 봐버려서 앞으로는 함께여행을 갈 수 있긴 할까 싶을 정도다.


물론 함께여행에도 장점이 많다. 나와 너의 집합 안에 한 줌의 교집합을 추가할 수 있으니까. 나홀로여행에서는 교집합을 만들기 힘들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나홀로여행에서의 짧은 인연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다시는 보지 않을 남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지 않은가.


세상이 좁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무한히 넓다! 그래서 뭐, 다시 안 볼 남이니까 하등 쓸모없는 게 맞다고?


그런 뜻이 아니다.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내게는 소중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소중하니까 소중하다. 마음이 그렇다.

또, 세상이 좁다는 말에 일부분 동의하기도 하는데, 그건 다시 보지 않을 남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언제든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다시 볼 남으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현지&나루님이 그렇다. 우리는 숙소에서 한두 시간 함께 이야기해 본 게 전부였지만, 서로 통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나만 받았나? 그럴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그들과 하루만 더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각각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해서 아쉬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현지님은 제일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고, 나와 나루님은 프라하 일정이 겹쳐서 그곳에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낯선 장소에서 만나는 조금 덜 낯선 사람. 프라하에서 나루님을 만나러 갈 때는 소개팅하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도 있었다. 오히려 애프터 만남이랑 더 비슷한 감정일 지도 모르겠다. 첫 만남에서는 잘 맞았다고 해도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괜히 불편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 섞인 설렘이 있었다.

돌이켜볼수록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진다. 나루님은 야간버스를 타고 아침 7시에 프라하에 도착해서 한숨도 자지 않고 나와 만나겠다고 했다. 체력, 괜찮을까. 잘츠부르크에서 프라하로 넘어온 날 극도의 우울감이 찾아왔던 나였기에 그녀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그곳 너무 추웠다. 나는 버티지 못하고 패딩을 사 입었지만 그녀는 반팔티만 가져온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으려나 싶었다. 무리하지 말고 내일 만나도 괜찮다고 해도 시간이 아깝다는 그녀. 체력도 강하지만 정신력이 살벌하다. 뭐, 나야 좋지! 하고 약속한 시간에 만난 우리. 그때까지 프라하 구경을 하지 않았기에 길거리를 거닐며 마그네틱 시세를 비교하고, 굴뚝빵도 사 먹고, 프라하성도 구경하고, 서로의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양조장에서 맥주도 마시고(현지님 추천 립스테이크까지 시켰다. 저희 잘했죠?), 마트에서 과자도 잔뜩 샀다. 관광자들의 뻔한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그 시간 내내 배꼽이 빠질 듯 웃어대었다. 프라하성에서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몸이 붕 날아올랐을 때는 끅, 끅, 숨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는 생리가 시작되는 바람에 컨디션이 떨어져서 함께 가려던 재즈바를 못 갔는데 나루님은 오히려 생리대를 챙겨주고 염려해주어 미안하고 고마웠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먼 곳에 살고 있지 않아서 한국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우리 한국 돌아가면 현지님 불러서 불닭발에 날치알주먹밥 시켜 먹어요.

당연하죠. 계란찜도 시켜도 되나요?

장난하세요? 당연하죠.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행에서 만나는 인연은 거기서 끊기는 거라고 단정 지었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는 거기서 시작된 인연일지도 모르겠다.

이거 먹다가 세상 모든 고기가 싫어졌다
비바람은 우산을 5초마다 뒤집어버린다. 나중에는 무념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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