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자연의 법칙을 규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뉴턴의 과학적 접근 방식을 따랐던 반면, 마셜은 이와는 확연히 다른 진화론적인 접근 방식에 관심을 두었다. (...) 마셜의 한계주의는 경제학에 접목된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307쪽)
K : 다윈 얘기 나오는 부분이 재밌었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철학까지, 과학이 인간의 존재 조건을 어떻게 규명하느냐에 따라 그 패러다임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구나 싶었다. 인간과 세계는 계속 점진 발전한다고 보는 다윈의 사고 토대가 있고, 마셜은 그것을 경제학에 적용했다.
Y : 지금까지 마셜을 현실과 굉장히 동떨어진 경제학자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합리적 소비자"라는 가정 때문이다. 뭘 하나 먹을 때 그 효용보다 가격이 더 싸면 그것을 선택하고 하나 더 먹을 때 또 효용을 비교해서 선택을 한다는 게 - 인간이 수많은 단위마다 효용을 따져가며 선택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인간은 너무나 비합리적이니까 말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않고 인간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이론만을 위한 이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면밀히 관찰한 사람이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 현대 경제학 원론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수요, 공급, 한계효용, 탄력성 등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하고 또 가르친 사람이었다.
H : 우리나라 주택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탄력성이 추측도 안 되고 예상한 것처럼 돌아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정책 속에서 일종의 실패를 한 경제적 주체도 있고 의도치 않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탄력성이 현실을 설명하는 데 큰 개념 틀이 되는 것 같다. 한계, 탄력성, 장단기 같은 경제학 개념을 봐도 마셜은 사고 실험을 많이 도입했다. 이미 20년 이상 이런 개념들을 말해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전통 속에서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결국 당대의 중요한 이론들을 종합하는 고전을 써냈다. 그때는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돼 있지 않았으니까 계보가 없었고 이 학교 저 학교에서 각자 가르치고 있었을 텐데, 그것을 정리하여 지금까지도 유용한 사고의 틀을 남겼다.
K : 마셜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 자신의 도덕적인 의지나 의도가 분명히 있었을 거다. 그런데 독점을 이야기할 때 "독점은 나빠"라는 도그마가 아니라 탄력성과 비탄력성 개념을 가져온다. 비탄력적인 소비자와 독점적인 자원(물건)이 만났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논증한다. 비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차례차례 정리하면서 독점은 이렇고 자연 독점은 이러니 공익 차원에서 비효율적이고 공공의 목적을 해친다고 논리적 연결을 만든다. 이 부분이 탁월한 것 같다. 이후에 실제로 미국에서 독점 문제가 불거졌다.
방적공장에서 짜내는 실이 방적공의 노동의 산물이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방적공의 노동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고용자와 관리자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고용된 자본의 공동 산물이다. 따라서 실을 짜내는 것은 많은 종류의 노동의 산물이자 기다림의 산물이다. 만일 그것이 노동과 기다림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만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자interest, 다시 말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은 정당화할 수 없는 냉혹한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331쪽)
나의 노동은 - 자발적 착취
H : 이자는 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아니고 그 자체가 신의 것이니 인간이 취하면 안 된다는 도덕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죄의식을 떨치고 '자본에도 수익률이 돌아가야 해' 하면서 '이자를 받아야지'가 되었다(우수라).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참고
자본에 리턴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는데 - 뭔가를 제공했으니까 - 그래도 찜찜하다.
K : 노동가치설은 노동만이 잉여를 생산한다고 하니까 잘못됐다고 하는 것 같다. 자본과 관리자의 기여도 있다고.
Y : 노동에만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자본의 이자를 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은 무엇을 만든다는 개념만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자로 일한다는 것의 본질은 시간에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나의 시간'의 총합이다.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 데 쓴다. 자기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물이 나한테 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노동자가 회사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투여하면 안 된다. 노동과 기다림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만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기다림을 이자라는 걸로 받아온다는 거다. 이 기다림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똑같은 시간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노동과 시간을 들이느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동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더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노동과 시간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것이 바로 자발적 착취다.
H : 요즘 내 삶을 반추하게 된다.(하하) 최근에는 뭔가가 통합되는 느낌이 드는데 왜냐하면 예전에는 회사에서 일하면 그 시간은 다 뺏기는 것이었고 나는 소외되어 있고 이 전체에서 내가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지, 능력이 될지를 도통 몰랐다. 어느 순간 창업해야지 안달복달하다가 그런데 그렇게 해도 나한테 다 안 돌아오는 거 같기도 했다. 지금은 일하는 형태가 바뀌기도 했지만 내 수익과 내가 제공하는 노동 사이의 균형이 깨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자발적 착취인가ㅋㅋㅋ
Y : 그런데 더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이 없다. 내가 손해를 봐도 더 줘야 지속 가능성이 생긴다.
H : 내 시간을 들이고 있고 과하게 일하는 부분도 있지만, 일을 해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상사에게도 딜리버리한다. 요즘은 그 과정에서 내가 발전하고 있다고 느낀다. 착취당하는 것 같은데 온통 헛되지는 않구나. 내 생산수단을 처음부터 가질 수도 없고 앞으로도 못 가질 수도 있지만, 내 수단이 없이 일하고 있는 지금도 100% 착취는 아니다는 생각도 든다.
K : 나도 비슷한 단계다. 하는 일의 종류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프리랜서가 되면서 노동 형태가 달라지니까 마인드, 주체성이 달라졌다. 가장 주요한 건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권한이 나한테 많이 넘어온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맘대로 쓸 순 없다. 그래도 컨트롤할 여지가 많다 보니 마음이 바뀌더라. 전에는 소위 노예 마인드도 있었고 꾸역꾸역 아침 9시에 나가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이제는 다르다. 물질적 조건과 환경이 사람의 관념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나를 느꼈다. 지금은 내가 주체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ㅋㅋㅋ
H : 그 주체가 완벽하지 않고 항상 완벽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1인 창업자여야 해', '너의 삶을 완전 맥시멈하게 살아' 하면서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말단 직원일 때도 내 삶을 살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론과 실천
H : 마셜이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 문제에 천착해서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열망에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 관점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빈곤은 일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도 했고.
Y : 똑같은 의문이 있다. 마셜이 인간을 사랑하고 빈곤층을 위해서 사명감으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뭘 한 걸까? 이론은 잘 정리해놓은 건 알겠는데 뭘 했지? 그런데 어떤 실천이나 실행이 행동, 운동, 선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론으로써 잘 정립할 수도 있다. 아까 이야기한 독점 문제처럼 이론을 치밀하게 만들어가고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선택과 삶의 모습을 이론화한 것이 마셜의 공헌이 아닐까.
K : 자연 독점에 관련해서 실제로 의회에 가서 발언하고 관철시켰다. 이론적 토대가 있었기에 정치적 설득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전기, 수도, 도로 등은 공공재여서 싸게 공급해야 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지 않은가.
Y : 이대 여성학과에 대해 토론을 한 적 있다. 활동가들은 이대 여성학과를 이렇게 말한다. 말만 있고 이론만 판다고, 진짜 활동가가 필요한 상황에서 활동이 없다고 말이다. 그럼 이론은 활동이 아닌가, 나가서 피케팅하는 것만이 실천인가, 자기 자리에서 기반을 만들어가는 것은 실천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매우 동감했다. 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도 실천이다.
H : 완전 동의한다. 저자가 마셜의 이론을 접목해서 설명해줬으면 아까의 의문점을 더 잘 이해했을 것 같다.
K : 저자의 관심사가 아닌 거 같다.ㅎㅎ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얘기하자면 마르크스도 운동 열심히 안 했다. 프루동 같은 사람이야말로 열심히 하는 활동가였고 달뜬 열정과 열망만 가지고 운동을 했는데 마르크스는 그걸로는 세상을 못 바꾼다,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미친 듯이 런던대학교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썼다. 그러면 마르크스는 실천을 안 한 걸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H : 충실한 이론을 만드는 게 실천이 아니라는 건 아니다. 마셜의 이론에 유용한 개념이 많은데, 이 경제학자가 초반에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게 됐다면 자연 독점도 경기 침체에 따라 사람들이 나쁜 영향을 받으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서 - 사람들이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 경제 주체들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하고 그걸 알고 정책을 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것도 생각해보고 저런 것도 현실에서 관찰해봤다 하면 좀 더 알 수 이해할 수 있었겠다. 이 부분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연결해야 하나 보다.
Y : 마셜은 입장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대변하지 않던 누구를 그 시각에서 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그들에게 언어를 준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입장론이기 때문이다. 마셜은 입장론으로 바라보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하는 과학의 자리에서 본다. 자연과학은 객관성, 검증가능성, 법칙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입장론은 주관성을 함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는 방법론 이야기다. 첫 번째는 지식을 공부할 때 모든 것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 안에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이 있다. 좋은 과학은 세상을 잘 설명해주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현실을 이론으로써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나쁜 과학은 누락된 게 많고, 한 면만 보면서 객관인 것처럼 설명하고, 사실을 호도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성학은 처음에는 지금까지 객관이라는 - 좋은 과학이라는 - 틀 안에서 설명했던 게 사실은 나쁜 과학이고, 그 데이터베이스에는 여성이 다 누락되어 있다고 하면서 계속 나쁜 과학에 데이터를 넣는 형태로 갔다. 이것이 경험주의 방법론이다.
두 번째는 입장론이다. 정희진의 책이 입장론에 경도되어서 쓴 대표적인 저작이다. 결국 객관의 세계는 정상성을 이야기한다. 나쁜 과학, 좋은 과학은 누가 결정하지? 누구한테 좋은 거야? 라고 물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입장을 면밀하게 보고 그 사람의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면 그 뒤의 배경이 제대로 보인다. 가정폭력 하나를 보면 그 뒤에 있는 사회적 질서가 다 보이게 된다.
그다음은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인데 생략하고 다시 돌아오면, 마르크스는 본인은 지식인이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입장론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했고 마셜은 의도는 비슷했을지 몰라도 학문을 하는 방법론에서는 인간의 삶, 인간의 행동양식을 수학적 모델,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정리하려 했다. 그래서 객관성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그런 느낌을 더 받는 게 아닌가 싶다.
H : 마셜은 세상을 좋게 할 건데 나는 한 명만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역동하고 있고 그걸 파브르가 곤충을 보듯이 관찰하고 싶다고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