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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Jan 22. 2024

내가 발 붙인 세계

   2017년 여름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독서의 세계를 만났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출연한 <어쩌다 어른>이라는 시사/교양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자신이 책을 왜 읽는지, 책을 어떻게 읽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에 단단히 빠져들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여가란 곧 책 읽기를 의미했다. 책을 읽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충격과 쾌감을 맛본 뒤로 나는 계속 다른 책을, 새로운 자극을 안겨 줄 책을 원했다.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졌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책 이름을 검색했다. 내가 찾는 책 이름 해시태그를 단 피드*가 쏟아졌다. 나는 그것들을 읽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기에 내가 찾던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내가 찾은 피드들은 모두 ‘#북스타그램’ 혹은 ‘#책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북스타그램의 세계는 끝없이 황홀하게 읽고 싶어지는 다음 책을 소개해주었다.


   두 아이의 출산과 그로부터 이어진 양육 노동은 내 뒤늦은 독서 열정에 가차 없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는 예전처럼 많은 시간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시때때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작은 생명 둘이 동시에 찾아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연약하고 무력한 그들은 빚쟁이처럼 드러누워서 죽을힘을 다해 울어 젖히고 용을 쓰고 먹어대고 토해댔다. 계속 안고 있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겠다고 악을 썼다.


   가혹한 현실이 나를 더욱더 깊이 독서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엉망진창인 집구석도, 두 시간마다 돌고래 소리를 내는 첫째와 잠시도 안아주지 않으면 바닥에 누워 잠을 자지 않는 둘째 걱정도 까무룩 잊을 수 있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이었다. 책 속에서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가장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혼돈이 가득한 감옥 같은 집구석이 아니라, 넓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에 안도했다. 나는 책으로 구원받은 동시에 저주받았다.


   독서에 빠져들수록 내가 책을 더 읽을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이 한없이 미워졌다. 애를 낳은 일은 인생 최악의 실수 같았다. 애를 왜 낳아서, 그것도 둘씩이나! 그들은 쌍둥이라서 하나만 낳을지 둘을 낳을지 선택할 수조차 없었기에 더욱 억울했다. 책을 읽고 싶은 열망은 인생 최고로 치솟았는데 내 몸 하나 마음대로 가눌 자유는 인생 최저였다. 엄청난 간극 때문에 자주 좌절했다. 여전히 북스타그램 세계를 기웃거렸지만 그때마다 더 깊이 좌절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그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책, 은은한 조명으로 차분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는 북스타그램 세계는 이제 내가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우아하게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재미있게 읽은 책을 피드에 올리는 일에 소소한 만족을 느끼던 나는 이미 흘러간 과거였다. 북스타그램 세계에는 우리 집처럼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집구석의 풍경도 없었고, 힘든 육아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양육자의 목소리도 없었다.


   갑자기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된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 반쯤 넋이 나간 나를 이해해 주는 건 책 말고는 없었다. 더욱더 병적으로 책 읽기에 집착했다. 책에서 나는 내 고통의 이유를 알았고, 그 고통이 나뿐만이 아니라 애를 키우는 모든 사람(여전히 주로 엄마)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고, 고통을 해석할 언어를 건져냈다. 그건 분명히 구원이었다. 이윽고 나는 책이라는 종교에 단단히 빠져버렸고, 독서 외에는 다른 무엇에서도 의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광신도’가 되었다. 결국 이 말을 남편에게 내뱉을 정도로.

   “이 애들을 낳지 말 걸 그랬어.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힘들어질 줄 알았다면 낳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 순간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한다.






ⓒ unsplash


   날씨가 좋은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 놀이터로 나간다. 이제 여섯 살이 된 그들은 내가 옆에 없어도 잘 논다. 나는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책을 꺼내 읽는다. 하늘이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데 바람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다. 놀이터에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꺄르륵거리는 둘의 웃음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온다. 함박웃음, 딱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않는, 모든 얼굴의 근육을 최대한으로 움직여 짓는 미소를 보고 나도 따라 웃는다. 다시 책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문장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아, 이거지. 너무 좋잖아.’하고 연신 감탄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주변이 너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간 거지. 설마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놀이터 옆 차도로 나가버린 걸까? 섬뜩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머릿속이 서늘해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놀이터를 향해 걷는다. ‘설마 어딜 갔겠어.’ 하는 마음과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하는 조바심이 뒤엉킨다.


   마치 숨바꼭질하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이, 그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곳에 있다가 나타난 거였다. 걱정했던 마음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안도감이 차오른다. 다시 벤치로 돌아가 책을 집어 든다. 책에 빠져 읽다가 갑자기 또 그들을 찾는다. 그들이 안 보이는 몇 초 동안 속으로 미친 듯이 초조해했다가 놀고 있는 그들이 보이면 안도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순간에 갑자기 내 신경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이 존재가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툭툭 끊어지는 집중력은 그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온전히 그들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집중이 끊어지는 순간마다 나를 현실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그들 덕분에 나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잘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그들 덕분에 나는 현실 세계, 그러니까 내가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책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이제는 놀이터에서 거의 나를 찾지 않는 두 아이가 나를 부르고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들이 밉지 않다. 밉기는커녕 조금 아쉽기도 하다. 너희들은 점점 더 나를 찾지 않게 되겠지. 나보다는 친구들이 더 좋아질 거고 어쩌면 나를 귀찮아하거나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부모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걸 피할 수는 없겠지.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이 미워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내가 미울 수도 있겠지만, 미워도 사랑할 수 있고 미우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마음도 있으니까. 조금만 덜 미움받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한때 그들을 미워했던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내게 보여주는 무한한 신뢰와 서투른 애정에 감탄하면서 이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 현실의 세계와 책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현실의 세계에 나를 확실하게 붙들어 매고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의 감각을 박제해 놓는 그들에게 고마워하면서. 그들의 존재 덕분에 나는 현실에 발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해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인스타그램 내 계정에서 업로드한 사진 혹은 영상이 첨부된 게시물 단위.

**소셜미디어(SNS)에서 특정한 주제나 내용을 담은 게시물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입력하는 검색키워드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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