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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Mar 19. 2024

아이를 키우려면 중산층의 외형이 필요하다?

교육잡지 민들레 151호 기고글 중에서

남편의 차는 20년쯤 된 낡은 중고차다. 그동안 우리 부부에게 차는 그저 이동 수단일 뿐이었지만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너 이제 차 좀 사라.”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뒤로 처음 시가를 방문했을 때 시모가 말했다. 시모는 본래 좀처럼 우리 집 일에 관여하지 않는 분이라,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차가 아직도 이렇게 멀쩡한데 왜요?”
 “애들이 이제 어린이집 다닌다면서….”
 시모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걱정되었으리라. 낡은 차 때문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무시당하거나 차별당하면 어쩌나 하고.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불안하니까, 그런 불안을 견디느니 차를 새로 장만해서 정체 모를 불안의 씨앗을 솎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단지 염려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처 말이 되지 못하고 흐려진 말들이 머릿속에서 점점 또렷해졌다. 너희의 차는 싸구려 중고차이고, 그런 차에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일은 부끄러운 거라고. 너희 차를 보고 어린이집 관계자들은 부모의 경제력을 얕잡아볼 테고, 너희 아이들마저 얕잡아볼지 모른다고. 어쩌면 다른 아이들은 겪지 않을 무시와 차별을 겪을 수도 있다고. 더 나아가 너희의 부끄러움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이제는 너희의 경제관과 경제적 외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로 ‘아이들을 위한다면’ 말이다.

 이런 말들이 내 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을 때, 시모가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서리야, 네가 진희한테 차 좀 사라고 얘기 좀 해봐.”
 그때부터였다. 내가 시모의 편에 서서 그에게 새 차를 사라고 종용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시모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시모의 말은 그저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불안이라는 호수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 하나였을 뿐이다. 나는 시모의 말이 가리키는 사회적 불안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차가 멀쩡히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됐지, 하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정체성을 내 것처럼 두르고 살아왔지만, 속으로는 주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들과 우리의 것을 비교하면서 열등감과 불안을 차곡차곡 쌓아왔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도 온갖 구실을 들어가며 새 차를 사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 찜찜했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솔직해지는 일보다 새 차를 사야 할 핑계를 찾는 일이 훨씬 쉬웠으므로, ‘중산층’의 외형을 갖추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동차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는 동네, 주거 형태,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는 ‘좋은’ 학군과 ‘나쁜’ 학군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좋은’ 학군에 있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거나 ‘나쁜’ 학군에 있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무리를 하거나 위장전입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아이의 옷과 가방, 신발 브랜드와 가격 또한 신경 써야 한다. 우리 아이가 무시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의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부모의 경제적 계급이 하나의 ‘신분’처럼 여겨지고, 부모의 계급이 곧 자식의 계급과 동일시되는 사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수저-흙수저’ 담론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옆 동네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돌면 난리가 난다. 임대아파트 이름 뒤에 ‘-거지’라는 말을 붙여 혐오하는 낙인을 찍는 ‘놀이’가 아이들 사이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 아이의 경제적 외형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일도 화가 나고 속이 쓰린 경험이지만 아이까지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건 몇 배로 괴로운 일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무시당하는 아이의 부모는 경제적으로도, 양육자로서도 무능력하다는 이중 낙인을 감당해야 한다.

 가난한 집 자식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여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싼 브랜드 아파트에 살며 ‘좋은’ 학군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 괜찮은 걸까? 그곳에서 더 까다로운 경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끝나지 않는 무한 경쟁의 루프 속에서 마지막까지 마음 편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양육자의 마음에 패배감과 열등감이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감정들은 해롭다. 스스로를 해치고, 나보다 가난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타인을 무시함으로써 (‘나는 그래도 저들보다는 낫잖아.’) 자기 위로를 하며 살아가기 쉽다. 혐오가 더욱 만연해지고, 만연한 혐오는 우리의 불안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가 아이를 위해 ‘중산층’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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