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의 새 책 '질서 너머'를 읽었습니다. 역시 조던 피터슨입니다. 그저그런 자기계발서 100권 읽느니, 이 책을 한 번 읽는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조언을 자식들에게 들려주지 않을까 싶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조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권위와 권력을 구분하라고 조언합니다.
요즘 '권위'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별로 좋지 못하죠. '권위적' 혹은 '권력지향적' 이라는 부정적인 말과 어감이 비슷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터슨 교수는 이 권위는 권력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면, 당면한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 그들은 권력이 아니라 능력에 마땅히 따라붙는 권위를 갖게 된다. ... 권위는 단순히 권력이 아니며,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은 극히 무익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능력과 경험을 갖춘 사람의 권위는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정해야할 최소한의 권위마저 부정한다면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필수불가결한 최소한의 권위를 '가부장적'이라고 매도하면 안되겠죠.
물론 구태와 부정적인 관례를 되불이하는 잘못된 권위에 대해서는 창의적인 변화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해결책을 생각 없이 되풀이하거나 권위를 내세워 고집한다면 변화가 불가피할 때 큰 위험을 맞을 수 있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문제 해결 구조를 중시하면서도 창의적인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피터슨 교수는 보수적인 인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권위, 위계질서, 기독교 가치관 같은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이 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터슨 교수의 발언이나 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보수적인 인물로 볼 수 없죠. 보수적인 가치에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균형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죠.
보수주의가 나쁘지 않고, 창의적 변화 역시 (심지어 급진적일지라도) 나쁘지 않으며, 각각에는 고유한 위험이 있음을 명심하라 ... 지혜를 아는 사람, 그러니까 두 관점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다양한 제안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정치뿐 아니라, 기후문제, 페미니즘 같은 사회담론에 대해서도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균형을 잃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특히 사회문제, 전지구적 문제보다 자기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충고는 일부 사회운동가들에게는 아주 뼈아프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지구 환경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삶에 긍정적인 일은 하나도 없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그런 문제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선순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꿰어야 할 단추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겸손함을 갖추는 것이다.
스스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날 때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정치, 사회, 종교, 철학 같은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나는 정답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죠.
자신의 이론으로 일신교를 만드는 지식인들을 조심하라.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하나의 변수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하라 ... 세계를 외부의 악마와 내부의 성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독선적인 증오를 정당화하고 이데올로기 체제 그 자체에 도덕성을 부여한다.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을은 대체로 자아도취적이고 도덕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죠. 이 도덕적 우월감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더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보통 주장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주장은 주로 타인에 대한 비난과 증오가 대부분입니다.
피터슨 교수는 이데올로기보다 해결하려는 문제에 집중하라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보내고, 더 작고 정확하게 정의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해야 한다. 문제를 정의할 때는 남을 탓하지 말고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크기로 개념화하고, 문제를 개인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그 결과를 책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말고 균형감을 갖고 문제를 분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죠.
의외로 부부관계에 대한 조언으로 한 장을 할애합니다. 사실 피터슨 교수는 임상심리학자죠. 부부관계에 대한 상담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입니다. 부부 상담도 상당히 경험이 많죠.
그 오랜 경험으로 좋은 부부 관계에 대한 세심한 조언을 해줍니다. 그 조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좋은 관계는 공짜가 아니다' 입니다. 좋은 관계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당신의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야 한다(당신의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그것은 무례한 게 아니라 사랑의 잔인한 손길이다.
핵심은 결국 깊이 있는 대화죠. 사실 바쁜 일상에 치이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말이죠. 그래서 그만큼 진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깊이있게 문제를 파고들어야 해결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립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을 '사랑의 잔인한 손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통계가 나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남녀가 헤어지는 비율은 결혼한 부부의 이혼율보다 상당히 높다. 게다가 동거하다가 결혼을 한 경우 이혼할 확률은 애초에 동거하지 않고 결혼했을 때 이혼할 확률보다 낮기는커녕 훨씬 높다. 그러니 서로를 시험한다는 생각은 유혹적인 말이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거를 하면서 충분히 상대방을 파악한 후에 결혼하면 헤어질 확률이 떨어질거라고 생각할 수 있죠. 저 역시 동거가 결혼의 단점을 커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거꾸로 동거가 이혼할 확률을 높인다는 겁니다. 언제든 내킬 때 헤어지겠다는 생각이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헤어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죠. 서로 부담과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세는 그 관계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반증이죠.
동거의 효용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감명 받은 부분입니다.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처럼 내일의 당신이 있고 다음 주의 당신, 내년의 당신, 5년 뒤의 당신, 10년 뒤의 당신이 있으니, 가혹할지언정 당신은 모든 ‘당신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저주는 인간이 미래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일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일을 한다는 건 앞에 놓인 것의 잠재적 향상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한다는 뜻이다.
몇 년 전에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에서 '분인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절대불변의 단일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뿐인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여러 얼굴의 자아가 있고 이 모습들이 모두 '진짜 나'라는 개념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 아주 도움되는 개념이죠.
그런데 이번 피터슨 교수의 책에서는 '미래의 나'라는 개념을 얘기합니다. 다른 시간대를 살아갈 여러 시간대의 나 자신을 마치 타인을 대하듯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를 살 때,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결정할 때, 지금의 나 뿐만 아니라 다음주의 나, 1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나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냥 단순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라는 생각보다 미래의 내 모습을 더 생생하게 그리면서 더 현실감있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피터슨 교수는 우리 삶의 최고 가치는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단기적인 행복감이나 쾌락을 말하는 것이죠. 피터슨 교수는 장기적이고 의미있는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그리고 그 과정에 만족할 줄 알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삶을 가치있다고 봅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 단기적이고 충동적인 목표를 버리고 더 큰 목표를 가져라. 그것이 모두에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피터슨 교수는 삶의 불행과 고통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닥칠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불행과 고통의 크기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삶의 짐이죠. 책임감있는 성인이라면 이 짐을 의연하게 질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인생의 고통은 불가피하며 악의로 인해 그 고통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진리로 여긴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훨씬 깊이 믿는 것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초월하고, 사회와 자연에 널린 사악함뿐 아니라 내면의 악의를 억제할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삶이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고통을 감당하고 견뎌내고, 결국은 이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삶은 그저 불행이자 고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죠.
피터슨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너무 차갑고 매몰찬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지금껏 혹독한 삶의 고통을 이겨낸 인류의 후예입니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특성이 우리 DNA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죠. 삶은 고통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으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