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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달수씨 May 20. 2023

리슨투마이허투

고장 난 나의 허투(HER2) 유전자와 선행항암

HER2 (Human Epidermal Growth Factor Receptor 2; 인간표피성장인자수용체 2형) 
 : 17번 염색체에 존재하는 유전자 단백질. 정상적인 세포에도 근소하게 존재해 세포의 증식 조절 기능을 담당하지만, 과잉 활성화가 되면 유방암의 예후인자로 바뀌어 세포의 악성화에 관여한다.

 - 서울대병원 홈페이지  





병이 들면 반(半) 의사가 된다고 한다. 책을 사보고, 기사를 검색해 보고, 유튜브를 구독하고, 논문을 (쓰지는 못해도) 찾아보며 병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때문이다. 실제 전문 의료진의 지식에는 반이 아니라 반의 반의 반의 반에도 못 미치겠지만, 적어도 내가 걸린 병의 치료과정이나 부작용, 그에 대처하는 나름의 노하우에 대해서는 빠삭해져 주변에 설명을 해주거나 '후배' 환우들에게 아는 척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암이라곤 고작 '기수'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도 유방암의 '아형(subtype)'를 구분하는 것부터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뭘 알아야 싸우지...(그런데 백전백승은 잘못된 말이라고 한다)


'아형'은 유방암의 종류를 세부적으로 나눈 것으로, 이에 따라 치료의 큰 방향이 결정된다. 항암제의 종류, 호르몬 치료나 표적 치료의 여부, 수술과 항암의 순서, 항암을 진행하지 않을 가능성 등이 아형에 따라 달라진다. 유방암 환자들이 모두 다른 경험을 갖는 이유다.(물론 크기, 위치, 전이 여부 등도 당연히 고려대상에 포함된다.) 


유방암의 아형은 유전자 발현 양상(gene expression profiling)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호르몬 수용체와 허투(HER2) 발현 정도에 따라 ‘호르몬 양성’, ‘허투 양성’ 유방암으로 구분한다. 둘 다 해당될 경우 ‘삼중 양성’* 둘 다 해당되지 않는 경우 ‘삼중 음성’ 유방암이라고 한다. 

*이중이 아니라 삼중인 이유는 호르몬 수용체에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유방암의 분류 @ 서울대병원



여성암이라 허투인가, 헐이라서 허투인가.


내 조직검사결과지. ER/PR Negative는 호르몬 음성, HER2 Positive 3+는 허투양성임을 나타낸다. Ki-67은 암의 공격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내게 생긴 유방암은 전체 유방암의 약 20%를 차지한다는 '허투 양성'이다. 왼쪽 가슴의 종양 두 개가 모두 허투 양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부위의 암도 다른 아형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HER라고 하길래, 대부분 여성이 걸리는 유방암*에 나타나서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Human Epidermal Growth Factor Receptor (인간표피성장인자수용체)의 약자라고 한다. HER 뒤에 붙는 숫자 2는 네 종류의 HER 유전자 중 2번째라는 얘기다. 아, 벌써부터 어렵다.

*허투 유전자는 유방암뿐만 아니라 침샘암, 유방암, 위암, 난소암, 자궁암, 자궁경부암, 폐암, 담도암, 췌장암, 직결장암, 방광암, 전립선암 등 다양한 암종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정상유방암세포 vs 허투유방암세포@우유TV
허투 양성 유방암 설명 @ 더연세유외과


가장 이해하게 쉽게 설명해 놓은 유튜브 영상에서는 허투를 성장인자(growth factor)를 잡는 손잡이(receptor)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몸을 떠다니며 세포를 분열, 증식시키고, 다친 조직을 낫게 해주는 등의 역할을 하는 성장인자를 야구공이라고 하면, 허투는 글러브 역할을 한다. 허투가 성장인자에 붙어 세포 분열을 도와주는 것이다. 


암세포 또한 성장인자들을 매개체로 분열, 성장한다. 허투 수용체가 너무 많아지면(과발현), 적은 양의 성장인자만으로도 암세포가 분열하고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렇듯 허투로 인해 암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 허투 양성 유방암이다. 같은 맥락에서 호르몬 양성 유방암은 호르몬이 과발현 되어 암세포를 증식시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이 꼭 어울린다. 역시나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표적항암제 만세, 의료보험 만만세


허투 양성 유방암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재발률이 높고 예후가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공격성이 뛰어나 암세포가 단기간 내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로의 전이도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매년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암이 자란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늦게 발견했으면 내 왼쪽 가슴을 꽉 채우다 못해 온몸 구석구석에 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표적인 허투 표적항암제, 허셉틴과 퍼제타@한국로슈


다행히 '허셉틴'을 필두로 한 표적항암제 개발로 인해 오늘날 허투 양성 유방암의 예후는 크게 개선됐다. 표적항암제는 암세포에만 나타나는 특정 단백질이나 유전자의 변화를 표적 하여(허투 양성 유방암의 경우 허투 수용체만) 암의 성장과 발생 신호를 차단한다. 전신에 작용하는 화학항암제('세포독성항암제'라고도 한다)와 달리 표적항암제는 암세포만 골라 죽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고 효과는 높다. 허투 양성 유방암은 표적치료 시 완전관해율*이 60%에 이른다고 하니, 소위 ‘약발이 잘 받는' 유형으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기간 내 굵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편, 짧고 굵게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완전관해 : 신체 검진, 혈액 검사, 방사선검사 등으로 평가했을 때, 치료 전 인지되었던 암의 모든 증상과 징후가 완전히 소실되고 최소한 1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뜻한다 (국가암정보센터

**호르몬 양성 유방암 환자는 표준치료 이후에도 항호르몬제를 약 5년에서 10년간 경구투약해야 하는 반면, 허투양성 유방암은 표준치료를 포함해 표적치료까지 약 1년 만에 치료를 마무리할 수 있다.


허셉틴은 1998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2000년 유럽 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고, 우리나라에는 2003년부터 사용됐다. 출시 당시 가격은 150mg(바이알) 당 96만 원이 넘는 높은 금액이었지만, 보험급여가 점차 확대되며 환자 부담의 부담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례로 허셉틴은 초기에는 전이성 허투 양성 유방암의 경우에만 보험급여가 적용됐지만, 2010년에는 비전이성 유방암 중 종양 크기가 1cm 이상인 경우에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선행항암 후에도 잔존암이 있을 경우 사용하는 '캐싸일라'라는 표적치료제의 경우 지난해 7월부터 보험급여가 적용됐다. 보험급여 전에는 전액 자기 부담으로 총 14회의 표적치료를 진행하는데 8천만 원 상당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반면, 이제는 약 2백~4백만 원(몸무게에 따라 투약용량이 달라짐)만 부담하면 된다. 여전히 적은 비용은 아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환자의 부담이 대폭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항암을 먼저 한다고?


잡초뽑기 - 제초제 뿌리기- 불지르기


유방암의 표준치료 과정은 수술-항암-방사선 치료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상 수술을 가장 먼저 진행한다. 암세포를 잡초로 비유한다면, 물리적으로 잡초를 뽑아내고(수술), 화학적으로 제초제를 뿌려 잔여 잡초를 제거하고(항암), 마지막으로 땅에 불을 질러(방사선) 혹여나 남아있을 수 있는 잡초의 씨를 아예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수술에 앞서 항암을 먼저 진행하는 ‘선행항암’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허투 양성 유방암과 삼중 음성 유방암은 선행항암을 진행하는 대표적인 유형이다. 


선행항암 vs 보조항암(후항암) @서울대병원


선행항암의 가장 큰 장점은 수술의 범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종양크기를 줄여 유방 전절제를 부분절제로 축소할 수 있다거나, 겨드랑이에 전이 됐을 경우에도 항암 결과에 따라 림프절을 모두 들어내지 않고 감시 림프절 일부만 절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부종과 같은 림프절 절제에 따른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


항암효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수술 후 항암을 진행할 경우, 몇 년간 재발 여부를 두고 그 효과를 추측해야 하는 반면, 항암 후 수술을 진행할 경우 암세포의 잔존 여부(관해여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최종 조직 검사 결과가 ‘허투 양성’으로 나옴에 따라 내 치료 계획에도 변동이 생겼다. 수술 날짜까지 잡아놨지만 수술 대신 항암치료를 먼저 시작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바빠졌다. 가발 살 시간이 있을까? 눈썹 문신도 아직 못했는데? 친구랑 약속은 미룰까? 휴직은 며칠자로 시작해야 하지? 갑자기 열흘 이상 앞당겨진 치료 시작 날짜 때문에 소소한 걱정거리로 머리가 잠시 복잡해졌다. 그러나 치료에 대한 두려움 보다 비로소 안심되는 부분이 더 컸다. 암흑 속에서 드디어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느낌이다.

 

그래. 가보자고.





*커버 사진 : 보아(BoA)의 일본 정규 1집 <Listen to My Heart> 커버. 우와 까마득하다.


*참고 사이트 (무순)

우유뉴스, 95% 할인된 치료제 급여 소식 전합니다(우유티비, 2022.7.16)

선행항암 치료를 왜 할까요? (우유티비, 2023.5.12)

허투양성유방암 (HER2 +)10분 요약 정리 (우유티비, 2021.12.28)

HER2 양성 유방암과 치료제 (더연세유외과 유튜브, 2021.3.8)

[SNUH 건강정보] ‘여성암 1위’유방암 (서울대병원 홈페이지, 2022.5.4)

로슈 '캐싸일라' 7월부터 조기 유방암에도 급여 적용 (데일리팜, 2022.6.22)

HER2 유방암, 치료제 접근성 '한 걸음 더'…캐싸일라 급여 확대 (메디코파마, 2022.7.6)

유방암 항암요법 건강보험 급여기준 대폭 개선 (의약뉴스, 2021.5.20)

'허셉틴' 비전이성 유방암에도 급여 혜택 (청년의사, 2010.10.21)

한국로슈, 유방암치료제 ‘허셉틴’ 발매 (메디컬타임즈, 2003.8.25)

로슈 HER2 양성 유방암치료제 ‘허셉틴’ ① (의학신문, 2016.7.18)

유방암 결과, Ki-67(키 67, 케이아이 67)은 무슨 의미인가요? (수서역 삼성서울 유외과 블로그, 2021.5.28)

유방암 조직에서 나온 HER2 (허투) 양성, 음성 무슨 뜻일까? (수서역 삼성서울 유외과 블로그, 2021.5.11)

유방암 항암치료 선택인가 필수인가 (유방건강TV, 2022.7.8)

암유전자 검사는 언제 필요할까...가족력, 기존 암 치료 받은 환자들에게 도움 (미디게이트, 2021.4.2)

HER2 양성 유방암 표적치료, 유방 원발암 치료하면 림프절 전이암도 사라진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보도자료, 20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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