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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달수씨 May 29. 2023

나의 항암 일지

어, 이거 할만한데? 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항암(抗癌) :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거나 암세포를 죽임.

*국립국어원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영어로는 chemotherapy(케모테라피), 말 그대로 ‘화학(chemo) 약품, 즉 항암제를 몸에 주입해 치료(therapy) 하는 것이다. 단순히 주사를 맞는 것에 불과(라고 감히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하다. 


왼쪽이 항암치료에 더 가까운 모습. 오른쪽은 방사선치료의 모습. 방사선도 암 치료법 중 하나지만 '항암'치료는 아니다.


유방암에 쓰이는 항암제는 크게 세포독성(cytotoxic) 항암제와 표적(targeted) 항암제로 나눌 수 있다. 세포독성 항암제는 정상세포보다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암세포의 특성을 이용한다. 암세포뿐만 아니라 전신에 작용되기 때문에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혈구수치감소, 탈모, 구토, 점막염 등이 대표적이다. 표적 항암제는 암세포에 특징적으로 과발현 되어 있는 단백질을 표적 하여 암세포 내의 신호를 차단한다. 드물게 심장기능에 이상이 생길 수 있지만 세포독성항암제에 비하면 부작용이 거의 없는 편이다. 


허투 양성 유방암의 경우 TCHP(또는 HPTC)* 조합의 선행항암치료가 일반적이다. TC는 세포독성항암제인 도세탁셀(Docetaxel)과 카보플라틴(Carboplatin)을 의미하고, HP는 표적항암제인 허셉틴(Herceptin; 성분명 트라스트주맙)과 퍼제타(Perjeta; 성분명 퍼투주맙)를 뜻한다.


아아, 그렇다. 표적항암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세포독성항암제의 사용은 불가피하다. 치료 효과를 향상하고 교차내성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어떻게든 탈모는 피해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세브란스병원 유방암센터 안내글




지극히 평범한 항암일의 모습


항암 전 날 밤, 

D-Day를 위한 준비물을 바리바리 챙긴다. 대부분 간식거리다. 텀블러에 물을 담고 탄산수와 두유를 추가로 챙겼다. 음료수를 많이 마셔야 항암제의 순환과 배출이 원활해진다고 하기 때문이다. 새콤달콤한 사탕 몇 알과 한입 크기로 자른 삶은 고구마와 과일도 챙긴다. 충전기와 이어폰, 아무래도 읽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몰라 책도 한 권 가방에 넣는다. 슬리퍼와 담요까지 챙겨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물건의 부피만큼 마음의 부담도 커질 것 같아 제외하기로 했다.


항암 당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진료 예약 시간 두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무리 없이 이후 스케줄을 소화해 낼 수 있다. 출근시간과 겹쳐 길이 조금 막히긴 하지만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한다. 첫 번째 할 일은 채혈이다. 백혈구, 간 기능 등 원활한 항암 진행을 위해 면역력과 관련된 수치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까딱하면 항암일정이 미뤄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어차피 맞을 매 빨리 맞고 끝내야지, 시간에 질질 끌려가는 건 정말 싫다. 


채혈이 끝나면 종양내과에 도착 접수를 하고 몸무게와 혈압을 측정한다. 이들도 항암을 진행하는데 중요한 지표다. 몸무게에 따라 항암제 용량이 결정되고, 너무 높거나 낮은 혈압도 항암 진행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와야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 그동안엔  조금 여유를 부려본다. 일찍 나오느라 걸렀던 아침을 먹거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책도 몇 장 넘겨본다. 


카레 먹고 싶다...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새 차례가 다가온다. 긴 대기 시간이 무색하게 진료시간은 3분. 진료 시간은 언제나 3분을 넘지 않는다. 인사를 하고, 컨디션을 확인하고, 항암 부작용에 대비한 약들을 처방받고, 궁금한 거 없나요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수첩에 줄줄 적어온 질문을 읊고, 대답을 듣고, 다음 진료 때 봅시다, 안녕히.으로 끝나는 뻔한 루틴. 왜 항상 진료실 문을 나서면 못다 한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지.

 

원무과에서 수납을 하고 원내 약국엘 가서 처방받은 약들을 기다린다. 봉투 한가득 약을 받고 나면, 먼저 '아킨지오'를 찾아 복용한다. 항암제가 가지는 다양한 부작용 중 구토/오심 방지를 위한 약이다. 의사의 처방에 맞춰 항암제가 제조되는 시간 동안 병원 주변을 슬슬 걷는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긴장을 한 탓인지 배도 고프지 않다. 




캐치테이블보다 더 좋은 병원 알림



항암주사실에서 병실이 준비되었다는 알림이 도착한다. 말이 주사실이지 평범한 입원실과 다를 모습은 별로 없다. 환자들로 가득 찬 병실, 분주한 간호사들. 어떤 환자들은 침상이 없어 아니라 의자에 앉아 주사를 맞기도 한다. 접수 대 앞 대기좌석도 언제나 만석이다. 암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이 공간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느껴지는 환자들의 몸부림, 살아내기 위한 소리 없는 아우성. 항암 첫날 마주친 주사실의 풍경은 참 낯설었다. 이내 익숙해졌지만...


호텔 방에 들어온 것 마냥 가져온 준비물들을 침상에 늘어놓고 있으면 간호사가 들어온다. 간호사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팔뚝 안쪽 또는 손목 또는 손등의 정맥*을 찾아 주삿바늘을 꼽는다. 팔 대신 쇄골 근처에 케모포트(chemoport; 정맥주사관)**을 심어 주사를 맞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히 내 팔 혈관은 여섯 번의 항암주사를 잘 버텨주었다.(한 5차쯤 되니 혈관 색이 좀 변하긴 했다.)


*주사를 맞는 부위는 크게 피부, 근육, 혈관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이에 따라 주사 요법도 피내주사, 피하주사, 정맥주사, 근육주사 등으로 나뉜다. 정맥은 피를 심장으로 보내는 혈관으로 정맥주사는 주사의 성분이 심장을 통해 몸 전체로 뻗어나갈 수 있다. 정맥주사는 약효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흡수가 빠르므로 약이 몸에 맞지 않거나 너무 강한 성분이 들어오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 주의가 필요하다. 주로 수액, 수혈, 약물투여, 혈액채취 등 응급상황이나 장기간 약물치료를 할 때 활용된다.(한국건강관리협회)


케모포트@국가암정보센터

**케모포트는 동전만 한 크기의 원통형 기구로 심장 가까이의 굵은 혈관까지 삽입되는 관(카테터) 종류 중 하나다. 쇄골 근처 피부 밑에 이식해 항암제를 주입하는 데 사용하고 항암기간이 끝나면 제거한다. 팔의 혈관을 보호하고, 매번 팔의 혈관을 찾는 불편을 덜어준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항암기간 중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고 감염 위험과 흉터가 남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국가암정보센터)


왼쪽부터 허셉틴, 허쥬마, 퍼제타


첫 번째 투약되는 약은 허셉틴(트라스트주맙)*이다. 허셉틴은 대표적인 허투 유방암 표적치료제로 과발현 된 허투(HER2) 유전자 신호를 차단해 암세포의 성장, 분열을 억제한다. 세계 최초의 표적치료제이자 허투 양성 유방암 치료의 새 지평을 열었던 '기적의 약', '마법의 탄환'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내게 투여된 약은 정확히는 허셉틴이 아닌 허셉틴의 바이오시밀러(biosimilar; 복제약)인 허쥬마(Herzuma)다. 우리나라 제약회사 셀트리온에서 제조한다.


다음 차례는 허셉틴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퍼제타(퍼투주맙)다. 퍼제타와 허셉틴 병용요법은 허셉틴 단일요법보다 약 19% 정도 재발 위험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이때가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챙겨 온 간식은 주로 이 시간에 꺼내 먹는다.


두 약물을 연달아 맞고 나면 잠깐 쉬는 시간이다. 그다음 차례인 세포독성항암제들의 부작용을 완화시켜 줄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맞는다. 체약저류, 과민반응 등 항암제의 투약 부작용을 줄여준다니 고맙긴 하나 이 주사들 역시 ‘센 놈’들이다. 주삿바늘로 약물이 들어가자마자 항문까지 화하고 찌릿한 느낌이 든다. 망망대해 흔들리는 조각배를 탄 것 마냥 갑자기 멀미가 나고 구역질이 난다. 이때 챙겨 온 새콤한 사탕을 물고 있으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레드썬. 나머지 두 약물, 탁소텔원(도세탁셀)과 네오플라틴(카보플라틴)을 맞을 때면 거의 비몽사몽이다. 노곤해지며 잠이 쏟아진다. 전처치를 위해 맞았던 항히스타민제의 부작용 때문이다. 선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한다. 준비해 온 휴대폰과 이어폰과 책은 이미 무쓸모 상태다.





시간이 흘러 흘러 준비된 약물이 내 몸 안으로 다 들어가면 드디어 오늘의 항암 치료 끝. 식염수로 관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약물까지 혈관 안에 집어넣는다. 네 개의 항암제와 부작용 방지제들을 맞는 주사 시간만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된다. 약이 주입되는 속도, 투약 시 반응에 따른 처치 등에 따라 시간이 한 시간 이상씩 늘어나기도 한다.(1회 차 때는 약물 용량이 더 많아 총 7시간이 걸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나오며 고생하신 간호사 분들께 꾸벅 인사를 한다. 어느덧 깜깜한 밤이다.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맡으니 상쾌하다. 주사 맞는 것 자체는 힘들 게 없다. 많은 양의 주사와 많은 양의 물 때문에 틈틈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조금 귀찮은 정도다. 큰 일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거뜬하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첫 항암을 마치고는 생각했다. 앞으로 내 몸에 일어날 부작용들은 생각지도 못한 채.







*커버 사진 :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염미정(김지원 분)이 참 예뻤다.


*참고 사이트

표적치료 (서울아산병원 유방암클리닉)

[남궁석의 신약연구史]회의·불신을 넘어..허셉틴 승인까지 (바이오스펙테이터, 2018-02-21)

퍼제타, 허셉틴과 찰떡궁합 확인 (메디칼옵저버, 2019.12.16 )

암의 진단과 치료 (서울대학교 암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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