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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달수씨 Jun 08. 2023

대머리

스누피 선생님을 추억하며...

대-머리1「명사」 머리털이 많이 빠져서 벗어진 머리. 또는 그런 사람
탈모1(脫毛)「명사」 「1」 털이 빠짐. 또는 그 털. 「2」 『의학』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학창 시절, 학교에 ‘스누피’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계셨다. 자그마한 체구에 뿔테 안경을 쓰신 선생님은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했다. 문제는 그 머리가 오직 귀 주변과 뒤통수에만 나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휑하게 비어있는 머리 한가운데, 소위 ‘소갈머리’를 곱게 기른 옆머리로 덮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드러나는 대머리.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건 기침, 가난, 그리고 대머리라고 했던가.(아님)


‘저 것이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헤어스타일이 아닌가, 덮는다고 덮어질게 아닌데, 그냥 쿨하게 밀고 다니시지, 왜 애써 가리신담?’


아, 이 얼마나 무례하고 오만했던 생각이었던가.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빠르게 자란다. (세포독성)항암제는 이와 같은 암세포의 특성을 이용한다. 빠르게 분열하며 증식하는 암세포를 파괴하고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는 암세포 말고도 빠르게 자라는 세포들이 있다. 혈구세포, 점막세포, 생식세포 등이 그것이다. 암세포와 동시에 이들 세포들도 공격의 대상이 된다. 머리카락을 포함한 온몸의 털들도 그중 하나다. 세포독성 항암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부작용이 바로 탈모(脫毛)다.


마이 프레셔스..... 헤어.....


탈모가 시작되는 시점은 첫 항암주사를 맞고 난 약 보름 후다. 이 기간을 ‘마의 14일’이라고도 부른다. 13일 차까지는 일부러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멀쩡했던 머리카락이 신기하게도 정확히 하루가 더 지나자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았던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듬성듬성해진 두피를 모자로 가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고, 모자를 쓰고 벗을 때마다 속절없이 빠지는 머리카락을 처리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비루한 머리숱에 미련을 가지다 골룸처럼 변해버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싶어, 차라리 다 빠져버리기 전에 먼저 밀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경험 많은 미용사는 모자를 쓸 때 어색하지 않도록 구레나룻과 앞 머리를 일부 남겨놓는 걸 제안했지만, 이왕 결심한 김에 '배코'*를 쳐달라고 주문했다.

*배코 :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아 낸 자리를 뜻하지만, 머리털을 모두 밀어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의외로 표준어다.


꺄아악 언니들 절 가져요! (왼쪽부터 시고니 위버, 데미무어, 샤를리즈 테론)


위이잉 바리깡 몇 번에 금세 대머리가 됐다. 왠지 연약한 환자보다는 씩씩한 여전사의 모습에 더 가깝다. '에일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 'G.I. 제인'의 데미 무어, '매드맥스'의 샤를리즈 테론 등 멋진 언니들이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파르라니 깎인 머리통을 보고 '어머, 난 두상도 예쁘네. 혼자만 보기 아쉬워...'라며 '자뻑'도 한번 해 보았지만, 누굴 보여줄 생각은 사실 하나도 없었다. 


욕실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


샤프심처럼 짧게 남아있던 머리카락도 항암이 거듭되며 이내 다 빠져버렸다. 파리가 앉았다 미끄러질 정도로 두피가 맨질맨질해졌다. 몸에 있는 다른 모든 털들도 몽땅 빠졌다.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 전 재빨리 눈썹 문신을 했던 터라 모나리자가 되는 건 면할 수 있었지만, 미모의 하락은 막을 수 없었다. 커다란 목각인형이 된 느낌이었다. 변해버린 얼굴에 카XX페이 얼굴인식조차 안 됐으면 정말 슬플 뻔했는데, 생각보다 IT기술은 뛰어나더라. 


외출할 땐 가발이나 모자로 위장을 했지만, 왠지 어색하기만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 사람들 모두 내가 대머리인 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감의 원천이 머리카락인 걸 그제야 깨달았다. 미용사 말 대로 구레나룻이라도 좀 남겨둘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그리고 스스로 별명을 붙였다. 


Death of Samson @ Die Bibel in Bildern / von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나는 삼손이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나는 강해질 것이다. 

한 올 한 올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커버사진 : 스누피의 진화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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