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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Sep 07. 2020

엄마와 파를 다듬으며

엄마를 보면 눈물이 나

엄마는 내게 늘 쓰고 싶은 존재였다.

 

 세상엔 엄마에 관한 수많은 글이 있지만, 내가 꼭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 그건 엄마일 것이다.

 결혼 전에는, 결혼하고도 엄마한테 자기 자식 키워 달라는 것, 반찬 얻어 가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은 민폐라 생각했다. 30년 가까이 먹이고 재우고 입히느라 오직 그러느라 일생을 바친 엄마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참으로 몹쓸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 후 나는 완전 독립을 선언했었다.


 나와 권 씨 집안사람들은 모두 안동 토박이이다. 아빠는 부산 해운대에서 만난 엄마에게 한눈에 반하셔서 무작정 서울 엄마 집으로 찾아갔고, 서울 토박이인 엄마를 안동시가 안동군이었던 시절에 면 소재지 작은 동네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젊고 고운 엄마는 나와 쌍둥이 남동생들 3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엄마의 친정 식구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나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을 텐데, 엄마와 한 쌍의 비둘기라 불렸다는, 지금껏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다는 복남이 이모도 보고 싶을 텐데. 한 번도 표현하시지 않았지만, 엄마의 크고 깊은 눈을 보며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늘 우리 삼 남매를 거두느라 정신이 없으셨지만 늘 외로워 보였다.


 나는 감사하게도 일찍 사회에 발을 딛게 되었고, 교직 5년 차에 접어드는 시점이었을 무렵, 아버지가 명예퇴직을 결정하시려던 무렵, 가족들에게 과감한 제안을 했다. "엄마를 해방하자, 엄마를 엄마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엄마가 그리워하고,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곁으로." 평생 안동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안동 권 씨 울 아버지에게 안동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일이 되려면 어떻게든 된다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어렵지 않게 내 과감한 제안에 동의하셨다. 아마도 어렵게 명퇴를 결정하시며 남은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픈 보이지 않는 흔들림과 결단이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엄마는 나를 제외한 권 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엄마의 엄마와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로 이사를 하셨다.


 혼자 안동에 남게 된 내게 지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엄마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응원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나는 결혼을 했고, 몇 년 후 남편의 직장이 있는 대구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내 생각은 여전했다. 양가 어르신들께 도움받지 않고 우리 둘 부부의 힘으로 육아와 직장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울면서 웃으면서 울면서 울면서 내 엄마로서의 인생도 시작되었다.


 2년 육아 휴직 후, 복직을 앞두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발령 통보를 받았다. 본사로 이동하라는 소식이었고, 나는 복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인생은 예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였다. 나의 복직과 함께 우리 아이는 생애 첫 어린이집 입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후 완전 독립을 선언했었던 내게, 우리 집에, 엄마가 왔다.






 엄마는 소식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내려오셨다.

 울 엄마는 엄마 껌딱지 아버지와 함께 내려오셨고, 엄마는 대구 우리 집에 내려오신 첫날 싱크대며 주방을 치우고, 닦고 정리하셨다.   

 우리 엄마는 왜 이리 짠하게 살아서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걸까.


 토요일 오후, 모처럼 만의 약속이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의 약속이었고, 남편이 오늘 하루 아이를 전담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로 출발 전 엄마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려고 엄마 방에 갔는데 계시지 않았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그때 뒷베란다에서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들렸다. 추운데 뭐 하시나 싶어 문을 열어봤더니 베란다에 파 다발이 펼쳐져 있다. 아파트라도 12월 한겨울의 추위에는 난방이 들어가지 않는 뒷베란다는 제법 춥다. 갑자기 화가 났다. 며칠째 감기를 달고 계시면서 추운 바닥에 앉아 파를 다듬고 계시는 모습에 울컥했다.

 이 추위에 콜록거리며 꼭 이 추운 바닥에 앉아 파를 다듬어야 하냐, 파김치를 꼭 먹어야 하느냐, 아플 땐 그냥 좀 쉬셔라..


 한 집안 살림이 그냥 되는 게 아니란 걸 이제는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절대로 양가 부모님의 물질과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 다짐했던 어제의 내가 가소롭게 느껴지는 오늘의 나와, 오늘도 새벽부터 딸과 그 딸의 딸을 위해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드시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콜록콜록.


 외출복 그대로 엄마 맞은편에 앉아 흙 묻은 파를 다듬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 늦으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느냐, 손톱에 흙 낀다, 옷 버리니 그만 일어나라 하신다. 못 들은 척 엄마가 파 다듬는 걸 자세히 보았다. 우리 엄마는 왜 나에게 파 다듬는 법조차 가르쳐 주지 않은 걸까. 손이 금방 흙색이 되었다.

 그래도 둘이 다듬으니 금방이었다. 멋쩍어지신 엄마가 사람 손 하나가 이리 크다, 벌써 이만큼이나 했다 말씀하시며 웃으시는데, 나는 파가 너무 매웠고, 눈물이 났다.


 12월의 겨울에 파를 다듬으며 친정엄마와 함께 살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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