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eeze Jan 22. 2024

박사 디펜스를 마치고

따끈따끈 이학박사의 아주 짧은 단상(을 쓰고 싶었다)


지난 11월 말 박사 학위 심사를 마쳤다

(박사 심사라 함은 그간 연구결과를 총망라한 박사학위논문의 작성과 여러 심사위원을 모신 후 자격 증명을 위한 발표로 구성된다. 박사 디펜스라고도 부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7년 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며 자격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7년의 고생 끝에 결실이라니!'라는 감성적인 감상이 크게 밀려오거나 눈물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D


 오히려 심사 후에 느낀 기분은 고3 수능이 끝났을 때의 느꼈던 침잠과 비슷했는데, 약간의 차이점은 있다. 수능이 끝난 후의 침잠은 허무함에 가까웠다면 박사심사가 끝난 후의 침잠은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라는 생각이었으니, 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성 여부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인생작은 둔덕을 넘어선 후에 느껴지는 감상에 방향성이 부여되었으니 10년 전에 나보다는 다소 성장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전에는 박사가 되면 어느 정도 완성에 가까운 하나의 독립된 연구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아주 큰 착각이었다. 디펜스를 거치고 나서야 나는 이제야 1인분을 할까 말까 한 아기박사가 된 것임을 알았다(응애). 이렇듯, 학위 심사를 준비하고 학위 논문을 쓰며 그간 가지고 있던 생각에 크고 작은 착각들이 있었음을 알았다. 또한,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나 새로이 느낀 바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되는 한 가지 소회를 남기고자 한다.



 - 저널논문(Article)과 학위논문(Thesis)


 과학적 실험을 통해 결과를 얻게 되어 특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때,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학계에 발표하며 지식을 공유한다. 발표의 수단으로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연구자들이 모이는 학회에 참가하여 포스터나 구두발표를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과학 잡지(ex. Cell, Nature, Science 등)에 투고하여 결과를 공유하기도 한다. 본인은 신경과학을 전공하였고, 분야는 과학 잡지에 투고하는 저널논문 게재 방식을 선호한다. 학교나 학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러한 저널 논문의 게재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학위 졸업 요건이 충족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전공한 분야의 경우는 연구의 호흡이 굉장히 긴 편이기 때문에 졸업까지 1편의 논문, 많아야 2편의 논문이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저널 논문 요건만 채우면 바로 졸업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박사학위를 위해선 '박사학위논문'의 작성이 필수적이다. 논문이 똑같은 논문이지 뭐가 다른 것일까. 사실, 본인도 이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했고, 지금도 확실히 안다고 말하긴 힘들다. 특히나, 분야 특성상 저널 논문을 한 편만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널 논문과 학위 논문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동료 과학자들이 학위논문을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스갯소리로 학위논문을 '아무도 안 볼 책' 내지는 '비싼 라면냄비 받침대'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은 과거의 나 또한 학위논문다소 형식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디펜스 발표도 '다들 이미 박사의 자격을 갖춰놓고 진행하는 작은 이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그렇지 않음을 몸소 느꼈다. 문득, 학위논문을 작성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위 논문이란 뭐지?', '저널 논문과 뭐가 다르지?', '그냥 서론과 토의 부분의 양만 늘려 적는 게 학위 논문이 맞을까?'



 - 저널논문과 학위논문의 차이


 먼저, 저널 논문(article)의 목적은 잘 정제된 하나의 문장을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다. 물론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순 있으나, 적어도 현대의 저널 논문의 트렌드는 그러해 보인다. 잘 설계된 실험으로 얻은 신뢰할 만한 결과를 통해서 여러 가능성을 소거하고, 궁극적으로 'A는 B다'라는 절제된 한 마디를 전달하는 것이다.


 반면, 학위논문(Thesis)은 저널 논문의 한마디들을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엮어 책을 내듯, 학위논문은 지식의 단편들을 모아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지식의 체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본인은 학위과정 동안 '시각적 위협자극에 대한 방어행동과 공포기억형성을 조절하는 신경회로 규명'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대주제는 여러 방면으로 세분화될 수 있는데, 방어행동과 공포기억형성을 각각 하나의 소주제로서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고, 다른 감각자극과 구별되는 시각적 위협자극의 차이에 대한 주제로 연구를 할 수도 있겠다. 깊게 들어가면 각 주제들을 신경회로 수준에서 볼 것인지, 신경세포 수준에서 볼 것인지, 세포 안에 단백질 수준에서 볼 것인지에 따라 더 세분화할 수도 있다. 

 학위논문은 위와 같은 세부 주제들의 연구결과들을 하나의 대주제로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결과의 나열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혹자는 학위논문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구 했는지에 대한 자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공학분야의 경우는 학위과정 동안 서너 편의 저널논문이 나오기도 해서 '저널논문 메들리'정도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학위논문의 목적은 자랑도 저널논문 메들리도 아니다. 학위논문은 작든 크든 하나의 지식 시스템을 구축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 되어야 한다. 또한, 다른 주제의 연구자들이 학위논문을 읽더라도 그 분야의 지식 발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고, 무엇이 새롭게 확장된 지식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지식적 아고라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학위논문의 서론 파트와 토의 파트가 길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글로 적자니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사실 대학원 과정 중의 연구는 대주제를 명확히 정하고 소주제를 차례대로 클리어해 나가는 과정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구체적이고 작은 주제들을 잡아 연구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주제를 탐색하고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의 반복이 많다. 그렇기에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실패들과 몇 개의 작은 성공들을 하나로 아울러서 묶어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본래 저널논문보다는 학위논문을 통해 연구자로서의 역량을 확인하고 연구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 간 나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고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본질적으론 학위논문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박사란 무엇일까? 

 

 박사 학위를 위해선 앞서 말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기에, 박사란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연구를 하든지 인류 지식의 뿌리에 아주 작은 수염뿌리를 새로이 덧붙일 수 있는 훈련된 사람들. 연구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들! 학위 과정 중에는 나도 박사 학위를 받으면 제법 멋진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문방구에서 팔레트를 사 온 것 같다.



- 마치며,


 사실, 제법 그럴싸하게 말해놓기는 했지만 내 학위 논문도 그리 잘 쓰지는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디펜스를 준비하며 들었던 여러 의문들을 정리해 보고, 발표가 끝난 후 느꼈던 '갈 길이 멀다'라는 생각이 든 이유에 대해 천천히 곱씹어 봤을 뿐이다.  그제야 어렴풋하게 정리가 되니 깨달음이 느린 사람이기도 하다. 학위 과정 중에는 나름 견고하게 논리를 쌓았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연구적으로 부족한 부분도 굉장히 많았다.


 요즘엔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과학의 의미나 연구자로서의 방향성에 대한 생각이 두서없이 떠오르는데, 이러한 생각과 이야기들을 좀 더 일찍 나눌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글을 쓴 이유는 나와 비슷한 단계에 있는 동료 연구자, 특히나 과학을 하는 후배들을 위함이다. 나 또한 생각을 계속해서 다듬는 중이니, 오늘 장황하게 쓴 글에 틀린 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박사학위의 의미와 학위논문에 담긴 의미를 사색해 보길 바란다. 분명, 학위과정을 마쳤을 때 더욱 멋진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보시는 선후배 동료 여러분들도 다양한 의견을 나눠주시면 참 감사하겠다.


 디펜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으나, 얻은 바가 적지 않아 기쁘다. 모두 좋은 연구를 쌓을 수 있는 연구자가 되길 희망한다. :D



매거진의 이전글 동전오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