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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eze May 21. 2023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좋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

 어릴 적이었다. 지하철은 만원이었고, 나는 몹시도 지쳐있었다. 다행히 앞에 자리가 나서 앉아서 갈 수 있었지만, 일행과는 모르는 이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 내 앞 쪽에 어느 노인 분이 서계시게 되었다. 잠시 도덕의 미덕과 몸뚱아리의 무거움을 저울질해보곤 나는 고요한 침묵을 택했다. 약간의 불편한 마음과 자기 합리화로 몇 정거장을 더 지났을 때, 옆에 앉았던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일행과 같이 앉을 요량으로 엉덩이를 슬쩍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어느 중년의 한 마디.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하차가 아닌 양보였다니!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게걸스럽게도 탐하다니! 몹시도 부끄러웠다. 인생을 돌이켜 부끄러운 순간들을 일렬로 세우면 분명 선두에서 대가리를 빼꼼 내밀 기억일 테다. 그날 마음에 새긴 한 문장은 '마음이 불편한 것보단 몸이 불편한 게 낫구나'였다.


 우리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부끄러움들을 느낀다. 어릴 적 학예회 무대에 올라 '나는 커서 무엇이 될 테야'를 부를 때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껴봤을 테고,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보였던 엉성함에 늦은 밤 이불을 찼던 경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끄러움은 예전 어느 시인이 느꼈던 부끄러움에 더 가깝다. 전자와 후자의 부끄러움은 '옳음이라는 사회적 합의, 혹은 개인이 추구하는 신념에 위배되는가'의 여부로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그 가치들을 훼손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낀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다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상태에서 나아가 그 감정의 원인과 앞으로 추구해야할 방향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이고 즉발적이지만, 이를 아는 것은 대단히 능동적이며 부단히 의식적인 과정이다. , 이는 옳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이자, 이상행하고자 하는 최초의 준동인 것이다. 부끄러움에 매몰되어 움츠러드는 것은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자기수양자라고도 볼 수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니 언제든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부끄러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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