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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Sep 10. 2018

애매한 재능

우리를 죽이는 동시에 살게 하는 “애매한 재능”

    

    오늘은 우리를 죽이는 동시에 살게 하는 “애매한 재능”에 대해 쓰려한다.

지금 붓을 쥐고 있거나 태블릿 혹은 마우스를 쥐고 있는 내 또래의 창작자들은 모두 깊이 공감하리라 생각된다.

           
 
   이 “애매한 재능”이란 주로 유년기에, 타인에 의해서 드러난다. 나의 경우에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미술 선생님에 의해서였다. 그는 수업시간 그림을 그리던 내 손을 꼭 잡고는 내 손이 “꼭 그림을 그려야 하는 손”이며 “다른 일을 하면 후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찬사인가! 한창 자아 탐구의 실현과 빛나는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던 중 2의 나에게는 그 말이 마치 내겐 내가 아주 대단한 예술가가 되리라는 것처럼 들렸다—그리고 실제로도 그 비슷하게 말을 했다.

    그날 나는 하교 후 곧장 집으로 가 엄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내 말을 듣고 난 엄마는 나만큼이나 기대에 부풀어서—어쩌면 나보다도 더—나를 이끌고 곧장 시내에 있는 미술 학원으로 갔다. 우리 모녀의 상담을 맡은 학원 원장은 빛나는 눈으로 나에 대해 요모조모 캐물었고 엄마는 매우 우쭐해져서 나 대신 대답을 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는 내가 엄마를 자랑스럽게 한 훌륭한 딸이 된듯한 마음에 꼭 이 비싼 학원비에 걸맞은 멋진 화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중2 여름, 대형 미술 입시학원의 예고 입시 반에 들어갔다.

    예고 입시 반에는 나를 포함 총 다섯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모두 성적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전까진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내 또래를 본 적이 없었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기억해보면 대충 “어떻게 실기도 잘하는데 내신점수도 좋을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솔직히 공부를 크게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그저 애매하게 했기 때문에—국어, 영어, 사회 점수만 높았음—그림이라도 열심히 그려서 부족한 내신을 실기로 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애매한 재능”이 어디 가랴. 나는 그림도 딱 애매하게 그렸다. 간혹 실기대회에 나가기라도 하면 꼭 내 그림은 B-,B+만 받아왔던 기억이 난다. 자신감을 잃은 나는 입시 날짜가 다가올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같은 입시 반 친구들도 나 때문에 기운이 빠진다며 한 소리씩 할 정도였으니 당시 내가 얼마나 우울하고 비관적인 아우라를 내뿜고 다녔을지 알만하다. 어쨌든 난 매월 80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며 남들 다하는 여름 특강도 하루에 8시간씩 했고 주말에도 무조건 학원에 나갔으며—사실 의무였지만—빠지는 날 없이 학원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예고에 떨어졌다.

    주변에 혹시 고등학교에 두 번 떨어진 사람을 알고 있는가? 나는 없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가려던 예고에도 떨어졌고, 그 후 지원한 1 지망 고등학교에도 떨어졌다. 비평준 화니 평준 화니, 예고도 일반고도 떨어진 내겐 다른 세계일 같았다.
어쨌든 고등학교는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친구들이라곤 아무도 없는 생판 모르는 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입학식 날 신입생들이 강당에 모두 모여 인원 파악을 위해 각자 출신 중학교의 팻말 앞에 줄을 서야 했는데 우리 중학교 팻말 밑에 33명이 쓰여있는 걸 보고 나는 또 한 번 낙담했다. “아 이걸로 나는 끝이구나.”

    사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미술학원 원장은 나 말고도 예고에 떨어진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는 예고 입시가 끝은 아니며 "우리의 최종 목표인 미대를 가기 위해서는 미대 입시 반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예고 진학에 실패한 두 친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고 나 혼자 학원에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의 결단력이 대단하다 느껴진다. 반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 좌절감과 허무함을 메꿔줄 다른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절망과 수렁의 늪에 빠진 나를 다시 한번 희망이란 이름으로 건져 올려 줄 그것. 물론 예고에 붙은 다른 애들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갈 거라는 질투심과 경쟁심 또한 큰 몫을 차지했음은 당연하다.

    짧게 말해 난 미대를 가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8년 전 그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혈연도 지연도 없는 이 타지에서 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동경하던, 그 이름도 찬란한 “미대”를 나오게 될 줄이야.

    이렇게 아름답게 이야기가 끝난다면 당신은 아마 날 잘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미대는 나의 “애매한 재능”에 대한 자기 연민에 마침표를 찍어줬다. 예고 입시 반에서 느꼈던 “세상은 넓고 재능 많은 사람은 많구나”의 충격은 영화로 치면 오프닝 시퀀스에 올라오는 배급사 타이틀 정도의 임팩트에 불과했다.
아, 그 미술 선생을—잠시 존칭을 넣어두기로 하자—나는 한동안 원망했다. 왜 그는 순진한 나를 달콤한 말로 살살 꼬드겨 이런 희망 고문을 겪게 해야 했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이 “애매한 재능”은 정말이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남을 탓할 수조차 없다니, 프로 자기 연민러인 나에게 더없이 좋은 떡밥이 아닌가.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우울감은 이제 내겐 매년 겨울이면 찾아오는 감기와도 같이 친숙했다.

    지금 나는 미국에서 구직 중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게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빛나는 재능”—애매한 재능이 아니라—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8년간 남들 잘 때 공부하고, 남들 공부할 때 그림 그렸던 어린 내가 너무 안쓰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방어라도 하지 않으면 난 이미 리버 스트릿에 퉁퉁 불은 몸으로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운 좋게도 훌륭한 부모님을 둔 덕분에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껏 해온 많은 것들을 잊게 될 것이고 내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예-술" 세계와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건 모두 공감할 테지만, 사실 “여태껏 해온 게 아까워서”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어쨌든 일반인보다는 더 잘 알고 잘하는 건 사실이니까—내 염세적인 생각으로는 일반인도 누구나 이만큼 시간과 돈을 쏟아부으면 프로가 될 수 있다.

    여기에 힘내라거나 우리 존재 모두 파이팅이라거나 하는 말을 전할 생각 따위는 없다. 이 긴 시간 동안 나는 “애매한 재능” 또한 재능이며 축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자기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며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애매한 재능이라는 단어가 유독 예술 업종에만 국한되는 이유 또한 나는 우리 혹은 사회가 그만큼 예술가들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할 땐 편하게 예체능으로 묶어 부르면서도 운동선수들에게는 애매한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유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성공에는 1만 시간, 즉 10년의 노력이 뒤따른다는 이론이다. 혹시 모른다. 나는 이제 8년 차이므로, 2년 후 10년을 채우면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서 내 재능을 더는 애매하지 않도록 완성해 줄지도. 장담하건대 그때까지도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며 내 재능에 대해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실은 자기 연민의 굴레에 빠지는 게 내 진정한 재능이 아닌가 싶다.


    자, 이제 애매한 재능도 하나의 재능임을 알았으니 나는 부모님께 치킨 가게 창업 자금을 부탁드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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