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우유를 추월하여 국내 톱기업으로, 그리고 매일유업과의 혈전까지
남양유업은 투자자의 입장에서도,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기업이다. 특히나 오너 집단의 의사결정 부분은 많은 비판을 부르고 있다.
이 부분이 바로 극대화 된 것이 얼마 전의 홍원식 회장 노쇼 사태다. 매각 계약까지 다 맺어놓고 정작 의결을 미루면서 계약의 신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런 남양유업의 모습들은 이 기업이 밟아온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왜 그러는지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양유업이 어떠한 궤적을 밟아왔는지를 써볼까 한다.
남양유업의 탄생은 1954년에 설립된 남양상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남양상사는 홍두영, 홍선태 형제가 세운 곳으로 50년대 유망업종 중 하나였던 비료 수입업을 메인으로 하고 있었다. 이 비료 수입업체가 왜 유업에 뛰어들었냐면 62년에 화폐개혁으로 인한 계좌동결로 인해 부도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완전히 쫄딱 망한건 아닌지 63년에 정부의 낙농진흥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낙농시찰단이 덴마크와 미국, 일본을 방문할 때 같이 합류하여 분유란 아이템을 발굴해낸다. 당시 여권이 매우 제한된 목적으로만 발급되는 것과 아무나 해외로 갈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본과 인맥이 여전했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그 다음해에 남양유업을 설립하는데, 당시 농림부 외화배정추천에서 갓 설립한 남양유업이 시설투자 명목으로 15만 달러를 배정 받아서 특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차관 덕분에 원유생산공장을 66년에 완공하고 67년 1월부터 남양분유를 출시했지만, 이때 남양의 앞에는 서울우유협동조합이라는 강력한 선발주자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서울우유는 오래 전부터 우유사업을 해왔고 많은 소와 낙농가를 확보한 곳인데다 전국적인 대리점 조직을 갖춘 곳이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당시 서울우유에는 면세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까지 따라갈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분유 출시마저 서울우유가 2년 빨랐기에 모든 부분에서 남양은 열세이기에 제대로 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양은 이걸 뒤집는데 성공했다. 서울우유보다 더 높은 가격을 ‘덴마크와의 기술제휴를 통한 품질’로 마케팅하여 고품질의 이미지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남양의 영업사원들이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다니면서 광고를 붙이고 적극적으로 세일즈를 한 덕분이 컸다.
여기에 우량아 마케팅을 실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69년에 서울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최우량아 전부가 남양분유를 먹었다는 광고를 낸 것이다. 물론 이는 허위광고였고 이 때문에 서울시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싹 무시하고 다시 동일한 광고를 집행했다가 서울시로부터 고발을 받기도 했다. 이런 분쟁이 있긴 했지만 효과가 좋았는지 남양은 72년부터는 아예 MBC와 함께 전국우량아선발대회의 공동주최자로 열심히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홍보와 마케팅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품개발을 통해 산모들이 원하는 상품을 잘 뽑아낸 것도 영향이 컸다.
이렇듯이 60년대 남양유업은 굉장히 일을 잘 했지만 서울우유를 추월한 것은 서울우유가 가진 조직적인 한계 덕분도 컸다. 서울우유는 협동조합이란 특성상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어 사업을 추진해야 했는데 생각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조합원들의 특성상 오너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사기업과 비교해서 그 속도와 추진력에서 큰 차이를 불러왔다. 바로 이런 한계 때문에 남양유업이 가진 저돌성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워 결국 분유 시장에서 밀려났던 것이다.
이렇게 경쟁자가 자취를 감춘 시장에서 베이비붐이라는 폭발적인 시장의 성장흐름을 타고 남양유업은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독주는 길지 못했는데 이는 매일유업이란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던 덕분이다.
매일유업은 1969년에 농어촌개발공사의 자회사로 설립된 한국낙농가공이 모태로, 71년에 민영화와 함께 50%의 지분을 가졌던 평안북도 출신 사업가 김복용씨가 경영권을 획득하면서 시작된다. 이 한국낙농이 72년에 일본 모리나가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우유를 출시한 것이 바로 매일우유였고 74년에 분유 산업에 진출하면서 남양유업과 본격적인 경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서울우유와 달리 사업가 출신인 김복용 대표가 운영하던 한국낙농(매일유업)은 매우 기민했다. 이 때문에 72년에 처음으로 제품을 출시한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75년의 매출이 48억원으로 분유업에만 집중했던 남양의 60억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복용 대표는 당시 업계 1위였던 남양을 벤치마킹했다. 남양유업이 우량아 선발대회를 적극 활용했다면 한국낙농은 임산부들을 위한 어머니교실을 열어 소비자가 될 여성들과 적극적인 접촉과 세일즈를 진행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낙농은 남양유업에게도 매우 위협적이었기에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한다. 한국낙농이 무당분유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단 뉴스를 보자 남양유업이 매일유업의 무당분유 정식 출시일보다 더 빠른 날짜에 무당분유 상품을 내놓음으로 국내 최초의 무당분유 상품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을 정도였다.
이 두 회사의 경쟁은 80년에 한국낙농이 매일유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81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탄생하면서 혈투로 변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공정위가 등장한 이후냐 하면 공정위의 등장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던 경쟁의 룰이 생겼고 과장광고를 규제하면서 이를 이용해 양사가 서로를 적극적으로 견제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81년 9월에 파주의 한 보육원에서 어린이 집단 식중독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원인은 우유병을 제대로 소독하지 않은 탓이었지만 하필 보육원에서 먹인 분유가 남양분유였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내린 것이다.
이 때문에 남양은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대대적인 광고물량을 쏟아내었다. ‘남양유업은 분유의 대명사’, ‘공주공장은 동양최대규모’, ‘남양분유는 세계 톱레벨의 분유’와 같은 문구를 붙이면서 말이다. 그만큼 남양의 분유가 믿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내용이다. 이에 후발주자였던 매일유업은 그대로 볼 수 없었는지 공정위에 남양유업의 광고가 허위과장광고라고 신고한다.
남양도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매일유업의 광고에서 ‘국내 최초 엄마젖에 가깝게 개발된 이상적인 유아용 분유’, ‘모리나가 기술로 개발된 매일분유G80’, ‘국내 최초로 모리나가 특허기술에 의한 카제인 분해시설’ 등의 문구가 허위과장광고라고 맞신고를 했다. 이 때는 이미 모리나가와의 기술제휴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모리나가를 언급할 수 없음에도 언급한 것을 건 것이다.
공정위측은 이 두 신고를 심사한 끝에 남양은 과장광고로 시정명령을 내리고, 매일유업은 허위과장 광고로 광고 중단과 해명사과를 광고하도록 조치한다. 둘 다 공정위에게 걸린 건 마찬가지지만 매일유업이 더 많은 허위과장이 있다는 판결로 더 강한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모르겠지만 이후 양 기업은 서로 감정을 실은 비방광고를 이어가면서 양쪽 모두 기업이미지란 측면에서 바닥으로 가는 경쟁을 시작하게 된다.
82년에는 남양이 L시스틴이 들어간 분유를 출시하면서 ‘세계 유명 분유들은 모두 L시스틴을 첨가한다’, ‘L시스틴이 없는 분유는 단백질이 20-30% 빠져나간다’, ‘L시스틴 양을 비교하고 엄마젖과 거의 같은 남양분유를 선택해라’와 같은 문구를 넣었다.
이에 매일유업이 허위과장광고로 신고하고 남양유업을 비방하는 광고를 실으면서 맞대응을 한다. ‘첨가물을 별도로 첨가하지 않는 것이 매일유업의 개발이념’, ‘매일분유는 첨가 없이 성분강화로 L시스틴을 넣었다’, ‘L시스틴은 사람 머리카락이나 동물 털을 탈색 가공한 것’이라는 강도 높은 비방이었다.
당연히 남양유업도 이를 허위과장광고라고 맞고발을 했는데 이에 대해 공정위는 두 기업 모두 허위과장광고로 규정하고 광고 즉시 중시와 사과광고를 내도록 조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사간의 고발과 징계는 계속되었다.
86년에 매일유업에서 ‘이가 나고 기기 시작할 무렵에는 칼슘이 많이 든 것을 선택하십시오’라는 광고를 냈는데 이에 대해서 남양유업은 ‘칼슘이 더 많이 든 것을 선택하십시오’로 맞받아친 것이다. 매일은 이걸 또 그냥 못보고 넘어가서 자기네들이 더 많다는 내용으로 광고를 했는데 이번엔 남양이 ‘많다고 좋은게 아니라 균형이 중요합니다’라는 식으로 되받아 쳐버린다. 이쯤에서 보면 알겠지만 자존심 싸움이 된 것이다.
남양유업이 분쟁을 벌인 곳은 매일 뿐만이 아니었다. 홍두영 대표의 동생인 홍선태 대표는 70년에 독립하여 남양산업을 차리고 이유식 시장에서 점유율 80%를 차지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남양유업이 84년에 점프A를 출시하면서 남양산업과도 분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남양유업은 회사명이 비슷하다는 것과 소비자들에겐 남양유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유식 시장을 파고들어 남양산업의 이유식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후의 일이지만 93년엔 남양산업의 제품을 사실상 유사품으로 취급하는 광고까지 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시작이 87년으로 남양측이 ‘성장기 분유의 시장 점유율 79.98%가 점프A임은 사실입니다’라는 광고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한 것은 남양산업이 아닌 매일유업이었다. 평소에 늘 남양을 공격할 틈만 보고 있던 매일 측이 이걸 보고 공정위에 신고하여 과장광고라는 판결을 얻어낼 정도였다. 이에 신난 매일은 공정위의 기사와 유가공협회의 공문을 복사하여 ‘남양이 과장광고를 했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싣고 남양은 이에 다시 ’79.98%는 사실이며 모 경쟁사의 비난에 현혹되지 마라’라는 내용으로 광고를 한다.
80년대에 유업사들은 정말 경쟁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로 유치하고 지저분하게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서 선을 넘는 마케팅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 공동의 적은 바로 파스퇴르 유업이었다.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