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경제학. 샌딜 멀레이너선, 앨다 샤퍼 지음
오늘도 마감을 앞두고 겨우 글을 완성했다. 사실 이 정도면 내 글을 만드는 건 8할이 마감이라고 해도 될 지경이다. 어떻게 인간이 시간이 남아 돌 땐 글이 안써지다가 마감이 다가오니까 급격하게 창의적이되고 생산성이 증가하고 효율적이 될까? 다 시간에 쪼들려서 그런거다.
시간이 남아돌면 일이 잘 안된다. 대부분은 기한과 마감을 정해서 시간을 제한해두고 부족하게 둬야 일이 진행이 된다. 시간이 넉넉할 땐 절대 이런 생산성과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오죽하면 마감이 일을 완성한다고들 하지 않나? 다들 학교 과제나 직장에서의 프로젝트, 개인의 일에 있어 마감이 닥쳐올수록 집중력이 높아지고 효율과 생산성이 증가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결핍은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결핍이 좋은 뜻으로 활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애정 결핍, 영양 결핍, 주의력 결핍 등 다 하나같이 단어에 결핍이 붙는 순간 어떠한 문제의 원인이 된다. 결핍이 뜻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이라서다. 부족한 것이 좋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부족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단순히 마감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부족함은 효율을 증대시킨다.
상대적으로 풍족할 땐 낭비하기가 쉽지만 그 부족함을 느낄 때면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예산의 제약은 어떻게 해야 이 제한된 예산으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들며 인력의 제약은 인력의 효율적인 활용을 찾게 만든다.
이러한 효율성의 증대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한 방안이다. 그렇기에 부족함과 결핍은 단순히 어떠한 상황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부족함이 없으면 효율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결핍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결핍의 경제학]은 결핍이 주는 이러한 효과를 '터널링 효과'라고 설명한다. 터널 속에 들어가면 출구만 보이고 그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처럼 결핍 상황은 주변의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그 결핍을 일으키는 문제의 해결에 골몰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 점에서 결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조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터널링 효과도 좋은 면이 있다면 나쁜 면도 있다. 터널링 효과가 터널 끝의 밝은 빛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게 집중하게 만들고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주위의 다른 부분에 눈을 감게 만들고 무시하게 만드는 효과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당장 눈 앞에 있는 단기적인 문제들이다. 그렇기에 이런 단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터널링 효과는 장기적으로 득이 되는 부분에 눈을 감는 장기적 손해를 낳을 수 있다.
우선 사람들이 가진 인지능력 자체가 무한하지 않다. [결핍의 경제학]은 이를 '대역폭'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건 쓸 수 있는 인지능력의 범위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운전하는 동안 운전자는 도로 위의 차량과 사람 등의 상황을 유동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전화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운전 중에 전화를 할 경우 그만큼 인지능력을 운전과 전화통화 양쪽에 모두 쏟아야 한다. 이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는 운전자는 그 나이가 아무리 젊더라도 도로 위의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과 반응이 70대 운전자와 다름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바로 이것이 운전 중 전화통화를 금지하는 이유인데 그와 마찬가지의 효과가 터널링 효과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현금흐름에서의 결핍 상황을 생각해보자. 당장 결제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현금이 들어올 날은 멀었거나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선 머릿속이 현금흐름의 결핍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꽉 들어차게 된다. 이렇게 현금흐름의 해결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선 그만큼 가용 가능한 대역폭이 축소되어 다른 분야에서의 제어 능력과 판단 능력이 하락하게 되고 더 충동적이기 쉽다.
가난한 사람들의 지능과 판단 능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낮게 나오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지능과 판단 능력은 고정적인 수치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아무리 젊은 운전자라도 전화통화에 신경 쓰며 운전할 때에는 70대 노인 수준으로 판단과 반응력이 하락하는 것처럼 가난이란 결핍에 대역폭을 대량으로 쓰고 있는 결과 그만큼 지능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대역폭이 줄어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그만큼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기가 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책은 좀 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야기한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단기적인 시각과 사고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누적해나가고 결핍의 악순환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핍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시간이나 일정, 가동률 등에 여유를 두고 운영하는 것이 더 높은 효율을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측면에서 정말로 관리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결핍은 바로 인지능력(대역폭)의 결핍 상황이다. 책에서 포커스를 두고 설명하는 것도 다양한 결핍 상황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얼마나 갉아먹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선택과 의사결정을 주제로 다룬 트레바리 모임 [선택이 어려워요]에서 두 번째로 다룬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선택과 의사결정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지능력의 결핍이라는 상황이 당장의 문제 해결에 바빠 장기적으로 좋은 선택과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즉, 결핍이란 상황이 나의 선택의 폭을 극도로 좁혀버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인지자원(대역폭)의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 차원에서 보자면 장기적인 선택이나 판단은 절대 시간에 쫓겨서 내려서는 안되며 대역폭이 충분히 확보된 상황에서 고려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당장 급한 상황의 경우라 하더라도 절대 배고픈 상황에서 내려서는 안된다. 배고픈 상황은 대표적으로 대역폭이 하락하고 인지능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초콜릿이라도 먹고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역폭 확보에 도움이 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쩌면 최고의 판단은 커피 한잔의 여유와 함께 하는 디저트를 먹는 순간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결핍을 다루는 만큼 책 전반적으로 빈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가 쓴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결핍의 경제학]에서 언급되는 빈곤 이슈의 상당수가 나온 책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