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근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정말로 많이 변했구나' 라는 사실이다. 비슷한 출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자랐음에도 어른이 되어 밟아가는 인생의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변한다. 특히 나는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진학했고 친구들과 몇년에 한번 정도 밖에 보지 못해서 그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았다.
하물며 서로의 배경이 다르다면 이 괴리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10대때까지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친구간의 거리감이 20대가 되고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커진다.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었지만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해서다. 이걸 '계급'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 차이, 그러니까 성격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면 할수록 거리감은 더 멀어진다. 원래 동질감은 서로를 가깝게 만들지만 이질감은 서로를 멀어지게 만드니까.
오늘 이야기할 최은영의[내게 무해한 사람]은 그런 점에서 다름으로 인해 멀어지는 관계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는 총 7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등장인물들이 10대에서 20대 초중반이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매우 가깝게 지냈지만 시간이 흘러 멀어져버린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10대때는 약간의 관심사만 겹쳐도 서로 가까워지기 어렵지 않다.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비슷한 문화를 경험하며 부모의 배경이 미치는 영향력이 비교적 약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두가 경험하는 공통의 경험이란 것이 사라진다. 대학만 하더라도 고등학교때까진 눈에 크게 두드러지지 않던 부모의 배경과 자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취미와 관심도 점점 세분화되면서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더더욱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의 다름이 보이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서로가 속한 위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가 다른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시점이다.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그 여름'의 주인공인 이경과 수이를 보아도 그러하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에서 우연으로 엮인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뜨거웠지만 결국 서로가 속한 위치가 다름을 느낌으로 인해 벌어지기 시작한다. 수이는 대학교 진학을 포기한 블루 칼라 노동자, 반면에 이경은 대학을 진학하고 화이트 칼라의 길을 밟아 갈 사람.
수이가 이경에게 표현하고 드러내는 사랑은 매우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고 분명 이경은 거기에서 큰 안정감과 행복을 느꼈지만 둘의 사이는 둘이 소속된 위치의 차이로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경에게 수이란 존재는 자신의 소속집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괴리감을 수이가 가장 체감적으로 잘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런 부분에선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떠올리게도 한다. 분명 영화 속에서 아델과 엠마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사랑의 관계지만 두 사람이 점점 거리감을 느끼고 벌어지는 포인트는 두 커플이 각기 속한 소속집단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델은 노동자 집안에서 자라서 노동자가 된 사람인 반면, 엠마는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자 예술가다. 엠마가 그의 친구들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이야기하는 동안 아델은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었고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경과 수이의 관계도 바로 그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601, 602'의 주인공인 주영이와 그 친구 효진이 또한 그렇다. 주영이네 집은 광명에서 태어나 돌고 돌아 다시 광명으로 온 집이고 친구인 효진이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아버지의 일 때문에 광명으로 이사를 온 케이스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인 경상북도의 가정 문화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많이 다르다. 주영이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던 효진이네 가족의 문화에 반발해 직접적으로 충돌했지만 그 결과는 효진이와 멀어지는 것이었다. 다만 주영이는 효진이와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별 다르지 않다는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지나가는 밤'의 두 자매는 같은 핏줄임에도 소속된 세계가 너무 다르다. 너무나 다른 존재였기 때문에 한쪽은 상대를 한심하게 여겼고 반대쪽은 그런 시각에 반발했다. 소속된 위치가 너무나 달라 멀어졌던 두 자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 지점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이후로 서로가 비슷해진 부분이 생기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모래로 지은 집'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세명의 등장인물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사이였음에도 서로의 배경과 경험, 소속 집단의 차이로 인해 점점 그 거리가 벌어져 간다. 셋은 서로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너무나 다른 존재들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그런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서로를 밀어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서로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 이외에 다른 이야기들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 책은 그래서 관계의 멀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 책이 참 좋은 것은 관계의 멀어짐이라는 동일한 줄기의 이야기를 7번이나 다룸에도 불구하고 다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선 동성애를, 어떤 부분에선 가부장제를, 어떤 부분에선 젠더 이슈를, 어떤 부분에선 폭력을 이야기에 녹여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관계의 멀어짐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픔을 견디는 것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굉장히 예민하고 위태롭게 쓰여 있기에 아픔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다름은 모든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지만 그 다름에도 유지되는 관계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의 약자가 가진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다른 그 어떤 관계든 간에 관계의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관계의 약자가 더 많은 비용을 치르기 마련이다. 이건 책에서 나비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듯이 사랑(관계)의 모양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관계란 누군가의 비용으로 유지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관계의 멀어짐은 언제나 다름으로 인해서 더 이상 한쪽이 비용을 치를수 없어서 끝나는 것 같다. 더 이상 다름을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 다름을 견디려면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니까.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시작부터 매우 비슷했던 10대와 20대 초반과는 달리 20대 후반, 그리고 30대, 그 이상으로 갈수록 우리는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더 많다. 출발점의 차이에 더해 살아온 궤적의 차이는 사람과 사람의 간극을 더더욱 벌린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다른 존재로 서로를 마주한다.
이 다름으로 발생하는 거리를 매우려면 관계의 약자가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치르고 다름을 견뎌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비용을 치르고 견디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왜? 내가 이만큼 살아왔는데 왜 그런걸 참아주고 견뎌야 하는거지?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래서 갈수록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지고 갈수록 외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너무 다른 존재이고 그 다름을 극복하기엔 에고가 너무 강하니까.
[내게 무해한 사람]은 내게 너무나도 좋은 책이었다. 그치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 겹쳐 보여서 정말 읽기 힘들었던 책이기도 했다. 일을 하다가 막혔을때 머리를 식힐겸 읽기 시작했지만 읽을 때마다 더 일을 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결코 어려운 책도 아니고 두꺼운 책도 아님에도 다 읽는데 6개월 정도가 걸렸다. 심지어 이 글 또한 읽은지 오랜 시간이 흘러 마음이 가라앉은 지금에 와서야 쓰는 것이다.
이 책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의 다른 책인 쇼코의 미소 또한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