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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시지푸스 May 27. 2019

신화 속 에로스 2)

세계 창조의 원동력으로서의 에로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처음에는 온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사랑을 모두 포괄하는 신이었다. 하지만 점차 그 의미가 축소되어 나중에는 인간들 사이의 사랑만을 가리키게 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려보기 위해 이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고찰하기로 하자. 이를 위해 우선 세계 창조의 원동력으로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에로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최초의 신들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카오스[혼돈]가 맨 처음 생겨났다. 다음엔 눈 덮인 올림포스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불멸의 신들 모두의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인, 가슴이 넓은 가이아{대지]가 나타났다. 땅속 깊은 곳 광활한 심연 속에 사는 음침한 타르타로스[지하세계, 심연]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고는 불멸의 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에로스가 생겨났다. 그는 모든 신과 사람의 팔다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마음속에 합리적 사유와 지혜로운 결단이 자리잡지 못하게 한다."


에로스는 최초의 신들 중 하나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인간만이 아니라 신들에게까지 미칠 정도로 강력했다. 그가 이렇듯 위대한 신들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에로스적 사랑이 세계 창조의 원동력이라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티마이오스』라는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계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이름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가 행한 창조는 유태교의 신인 여호와가 한 것처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었다. 혼돈의 상태로 있던 무언가에 어떤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만물을 창조하였다.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이 바로 에로스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떤 존재자든 그것이 생성되고 유지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혼돈 속에 뒤섞여 있던 재료, 즉 질료(質料)들 사이에 명확하게 경계가 지어짐으로써 조화롭고 질서 잡힌 어떤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려면 어떤 질료를 다른 질료로부터 분리하고 경계 지어주는 힘이 필요하다. 이렇듯 경계 지움을 통해 질료들이 서로 구분되는 것은 에로스적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뒤죽박죽 섞여있어 제대로 서로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는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명확하게 구분된 요소들을 결합시켜주는 힘이 필요하다. 질료들이 그저 구분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끌려 이런저런 형태로 결합되어야만 무언가가 새로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자를 탄생시키는 힘을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라 불렀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적 사랑은 물리적, 화학적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생명 없는 것들로부터 식물과 동물, 인간과 신까지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 원인이었다. 


이렇듯 위대한 에로스는 인간과 신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헤시오도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 팔다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합리적인 사유나 지혜로운 결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묘사는 얼핏 보기에는 에로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격정적인 에로스적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떤 동물이든 적어도 잠시 동안은 몸을 움직이기조차 귀찮을 정도의 나른한 상태로 빠져든다. 다른 한편 교미기의 동물에게서는 에로스적 광기가 엄청나게 분출된다. 이럴 때면 그 동물은 자신의 경쟁자와 죽음을 무릅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합리적 사유와 지혜로운 결단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이나 신들도 매우 자주  이러한 광기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것이 인간의 도덕 관습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나중 문제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에로스적 광기에 사로잡힌 신이나 인간들의 부도덕함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긴 세월이 지난 뒤였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에로스를 세계 창조의 원동력으로 여겼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에로스가 가장 위대한 신 중 하나로 추앙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인용한 『신통기』에서도 그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신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존재로 나타난다.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플라톤의 『향연』 속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에로스를 높이 찬양받아 마땅한 신으로 기리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 관련 문헌들을 살피다 보면 최초의 신들 가운데서 에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묘사되는 신들이 있다. 퓌시스[본성, 자연], 아낭케[운명, 결핍], 크로노스[시간], 파네스[빛]가 바로 그런 신들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들과 에로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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