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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시지푸스 May 12. 2019

신화 속 에로스 1)

신화의 기원과 그 의미

저 먼 옛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뮈토스(μῦθος)라 부르던 이 이야기들은 문자가 발명되고 나서 책으로 기록되게 된다. 흥미롭게도 뮈토스라는 단어는 ‘말하다,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뮈테오(μυθέω)의 명사형이다. 우리가 신화(神話)라는 이름에서 추측하듯 신들에 관한 내용은 적어도 단어의 어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계가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고 변모해왔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내면서 신이나 반신(半神)으로서의 영웅들에 얽힌 이야기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나중에 신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뿐이다.


세계 창조에 대한 서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되는 시기에 더 가까운 후대의 역사에 대한 서술일수록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어쨌든 신들이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때때로 혹은 매우 자주 자신들의 삶에 개입한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현실과 동떨어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들이 이러한 경로를 통해 신화 속에 담겨 후대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형성되었기에 그 안에 등장하는 신이나 영웅들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특성들이 하나의 신에게 부여되기도 하고, 신들끼리의 관계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관심 대상인 에로스도 어떨 때는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난 태초의 신 중 하나로 언급되지만 다른 때는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의 숙모뻘이었다가 다른 곳에서는 그의 딸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신화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논리 정연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일이 생기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각각의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에 따라 거기에 나타나는 신의 모습에도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세계가 처음으로 생겨나던 시기에 나타났다고 여겨지는 신들이다. 이들을 처음으로 탄생한 신들이라는 뜻으로 프로토게노이(Πρωτόγενοι)라고 부른다. 그다음에 출현하는 신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 산에 거한다고 믿었던 신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었다. 


전자가 주로 우주 전체의 탄생이나 운행과 관련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주로 인간의 삶과 관련된 도덕적 가치나 인간의 정서를 담당하는 신들로 구성되었다. 묘하게도 이러한 경향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 발전한 흐름과도 매우 유사하다. 밀레토스 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발전했던 자연철학은 주로 우주 탄생의 근원이나 모든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근본 원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반면 소피스트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물음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철학자들이다.


프로토게노이에도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한 부류는 자연 대상이나 현상을 다스리는 신들이다. 이 신들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그들이 담당하는 영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가이아는 대지를, 우라노스는 하늘을, 뉙스는 밤을, 에레보스는 어둠을 뜻한다.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혼돈의 신 카오스도 여기에 속한다. 프로토게노이의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신들은 우주적 질서를 관장하는 신들이다. 시간을 관장하는 크로노스, 운명이나 필연성을 관장하는 아낭케, 생성과 발육, 소멸(죽음)을 관장하는 퓌시스, 생명의 탄생, 사랑을 관장하는 에로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에게 고대 그리스 신들의 특징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를 바라면서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신화 속 에로스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우선 프로토게노이 중 하나이면서 우주 창조의 원동력으로서의 사랑을 대변하는 에로스를 고찰한 다음, 인간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열정적 사랑을 대변하는 신으로서의 에로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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