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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시지푸스 Apr 28. 2019

에로스: 미친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세 가지 이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3)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로 든 보로매우스의 매듭은 사실 매듭이라기보다는 세 개의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데, 하나의 고리가 끊어지면 다른 두 고리의 연결도 해체되는 특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4세기경 북부 이탈리아 지방의 귀족 보로메오(Borrmeo) 가문의 문장()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보로매우스의 매듭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로매우스의 매듭

사랑의 세 가지 형태인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사이에도 이렇듯 어느 하나가 풀어지면 다른 둘 사이의 관계도 모두 해체되어버릴 정도의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지나친 열정이나 욕망은 사랑을 그르친다고 아가페나 필리아의 옹호자들이 주장할 수 있겠지만, 과연 열정이 결여된 사랑이 참된 사랑일까?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필리아적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아무런 열정이 없는 필리아가 가능할까? 아가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정이 없는 아가페는 상상하기 매우 어렵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처럼 사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열정을 필요로 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보로매우스의 매듭

다른 한편 수많은 치정 살인사건에서 우리가 확인하듯 이성이 결여된 열정적 사랑은 인간을 분노와 광기로,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몬다. 그것을 바람직한 사랑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또 아무런 이성적 판단과 그에 따른 결단과 행동 없이 순수하게 주기만 하는 그런 아가페적 사랑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예를 들자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히틀러 같은 악인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마찬가지로 열정적이든 이성적이든 사랑에 아가페적 요소가 완전히 결여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를 주저한다. 아무리 필리아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손해 보지 않는 방식으로만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경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단언한다. 연인 중 한 사람이 자기의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연애의 상대방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때 그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그/그녀에게 훨씬 더 감동하지 않는가? 


물론 실제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기란 너무나 어렵고 드문 일이다. 심지어 그런 이상적 사랑이 이루어지는 경우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비극적 결말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렇듯 온전한 사랑은 자신의 주군인 영주의 부인에 대한 열정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유지하려 했던 중세의 기사도적 사랑만큼이나 불가능한 사랑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뒤엉킨 실타래 안에서 헤매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채우려 한다. 사랑은 인간의 내면에 가장 깊이 아로새겨진 본능인 것이다.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진지하고 깊이 있게 알아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 세 가지 사랑 중 어디로부터 출발해야 할까? 앞서 살펴보았듯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면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사이의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를 항상 고려해야 하기는 하지만 세 가지를 동시에 살펴볼 수는 없으니 어느 사랑으로부터든 먼저 시작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의 선택은 에로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어떤 예술장르에서든 가장 자주 작품의 소재가 되어 온 것이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가장 먼저 사랑에 대한 신화적,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오늘날 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도 역시 에로스다. 바타이유, 프로이드, 라캉, 바르트, 푸코, 크리스테바, 바디우, 지젝 등 수많은 현대철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글 속에서 에로스의 이름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 하나 우리가 에로스로부터 사랑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는 중요한 이유는 누구나 가장 많이 느끼고 싶어 하고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랑의 감정이 바로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노래하는 사랑도 역시 에로스다. 


다음 글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에로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선 저 먼 신화의 시대에 에로스가 어떻게 가장 오래 된 신들 중 하나로 추앙받았는지, 어떻게 세상만물을 창조하는 원동력을 상징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또 왜 에로스가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혼을 대변하는 프쉬케와 운명적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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