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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시지푸스 Apr 14. 2019

에로스: 미친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세 가지 이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2)

사랑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감정만을 가리킬까? 그렇지는 않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연인끼리의 사랑, 인류애가 모두 사랑이라 말해지기는 하지만 그 성격은 서로 매우 다르다. 그래선지 사물이나 사태가 갖는 여러 측면을 모두 나타내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고대 언어의 경우 사랑을 가리키는 데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 그리스어가 대표적인 예다. 그리스인들은 사랑의 감정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데 에로스 (ἔρως), 필리아 (φιλία), 아가페 (ἀγάπη), 스토르게 (στοργή), 에피튀미아 (ἐπιθυμία) 등 여러 단어를 사용하였다. 


에로스는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열정적인 감정으로 성적 욕망을 가리켰고, 따라서 종족번식이나 다산과도 관련이 있었다. 필리아는 어떤 대상에게 끌리는 마음, 그 대상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정 등을 가리켰다. 아가페는 일상용어에서는 친절하게 접대하다, 다정하게 대우하다, 환영하다, 어떤 대상에게 만족하다 등의 뜻으로 쓰였다. 스토르게의 경우는 가족끼리 느끼는 따뜻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에피튀미아는 욕망이나 그리움, 열정, 쾌락 등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중에서 이후 서구인들의 사유 속에서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내는 말로 주로 사용된 것은 앞의 세 단어다. 나머지 두 단어는 사랑에 관한 연구문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왜 그랬을까? 어원을 살펴보면 스토르게는 부드럽게 또는 온화하게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스테르고(στέργω)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 우정이나 단순한 애호의 감정을 나타내는 필리아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선지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와 필리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미미한 것으로 여겨졌다. 


에피튀미아는 고대 문헌에서 에로스와 자주 혼동되어 사용되었지만 사랑의 감정보다는 충동, 욕망의 측면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을 분석해보면 ‘위로, 위에’를 뜻하는 접두어 에피(ἐπί)와 생명력, 열정, 충동, 욕망, 의지 등을 뜻하는 튀모스(θυμός)의 추상명사형 튀미아(-θυμία)의 결합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튀모스는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내면의 힘이라는 뜻에서 생명력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 생명력이 위로, 즉 바깥으로 솟구쳐 나올 때 그것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에로스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며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는 언제나 에피튀미아가 사용된다. 하지만 사랑의 측면보다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욕정, 욕망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게다가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언제나 악한 것으로서 피해야 할 것이거나 심판의 대상으로만 언급된다. 신약성서에서 사랑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대목에서는 오직 아가페와 필리아만이 사용된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의 의미가 항상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다. 플라톤 이전의 문헌에서는 필리아가 에로스적 사랑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주를 이루는 근본 원소인 흙, 물, 공기, 바람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우주의 모든 사물이 그 형태를 갖추게 되는데 그 결합이 해체되게 되면 그 사물 또한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결합시키거나 해체하는 원리를 그는 사랑과 불화(네이코스; νεῖκος) 두 가지로 제시하였다. 이때 사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단어는 에로스가 아니라 필리아와 같은 어원을 지닌 필로테스(φιλότης)였는데, 실제로는 에로스와 거의 같은 뜻을 지닌다. 신화 관련 문헌에서도 필로테스는 섹스나 관능적인 사랑을 담당하는 정령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이르면 에로스와 필리아의 의미가 조금씩 분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한다. 


아가페도 일상어에서는 필리아적 사랑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에로스적 사랑을 가리키기도 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명사 아하바는 에로스와 같이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지만 신, 이웃이나 가족, 친구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데 두루 사용되었다. 그런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역본인 칠십 인역에서는 이 모든 경우에 아하바를 아가페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신약성서에 이르게 되면 아가페는 철저하게 신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미로만 사용된다. 이렇게 확정된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의미는 이후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대 서구 언어들에는 이 세 가지 사랑의 종류를 명확하게 구분해줄 수 있는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에서도 사랑의 서로 다른 종류에 대해 언급할 때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어 단어들의 음을 그대로 차용하여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우리말에도 이러한 차이를 살려 사랑의 서로 다른 측면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들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 글에서도 이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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