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잔으로 시작하는, 관계에 대한 작은 생각들
우리는 지난 글에서, 도시공학자의 눈으로 도시의 밤을 엿보았습니다. 화려한 불빛보다, 어두운 골목의 작은 온기에 더 마음이 쓰이는 도시. 어쩌면 그게 더 '사람 사는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죠.
글을 쓰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가꾸는 '인간관계'야말로, 우리가 평생을 바쳐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도시'가 아닐까? 하고요. 당신의 가족, 당신의 팀, 당신의 친구들... 그 도시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내고, 어떤 불을 밝히고 있을까요.
오늘은 정답을 찾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도시공학자의 설계도를 슬쩍 훔쳐 와, 우리의 관계라는 도시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작은 힌트가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가볍게 이야기 나눠보고 싶을 뿐입니다.
완벽한 해결사보다, 엉성한 피난처가 되어주는 것
상황: 친구나 동료가 힘든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지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해결책부터 찾게 됩니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조언들이 정말로 위로가 됐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도시공학자가 이런 말을 했었죠. "가장 깊은 위로는, 가장 편안한 소파에서 이루어지던가요?"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완벽한 해결사'가 되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가 어떤 체면이나 꾸밈도 없이,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속내까지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조금은 엉성하고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솔직해질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가 되어주는 것.
판단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냥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그의 서툰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 그 '불완전한 공간' 속에서, 그는 오히려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갈 힘을 얻게 되는 건 아닐까요.
우리의 작은 발견
가장 좋은 위로는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떤 말을 해도 괜찮다'는 안전함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이야기가 머물 '진짜 공간'이 되어줄 수 있다.
고요한 경청보다, 다정한 배경이 되어주는 것
상황: 누군가 용기를 내어 깊은 상처를 고백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진지한 눈으로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합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중요하게 듣고 있어'라는 표현이겠죠. 하지만 도시공학자는 또 다른 힌트를 줍니다. "가장 내밀한 이야기는, 완전한 정적 속에서보다, 적당한 소음 속에서 더 쉽게 흘러나온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부담스러운 침묵은, 오히려 그의 모든 말을 감시하는 듯한 압박을 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그의 고백이 그 안에서 안전하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세상의 다른 시선들을 막아주는 '따뜻한 소음'일지도 모릅니다.
함께 라면을 끓이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함께 TV를 보며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그런 일상적인 '소음'은, 그의 고백이 너무 유난스럽거나 심각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가장 다정한 배경음악이 되어줍니다. 그 '소음의 담요' 아래서, 그는 비로소 가장 작은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게 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작은 발견
진정한 경청은, 조용히 눈을 맞추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함께 걷고, 함께 일하며, 그의 고백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는 것.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그의 가장 큰 용기가 될 수 있다.
환호하는 관중보다, 보이지 않는 땀을 닦아주는 한 사람이 되는 것
상황: 친구나 가족 그리고 동료가 큰 성공을 거둡니다. 모두가 환호하고 축배를 들죠. 당연히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도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가장 밝은 빛은, 가장 짙은 그늘을 만든다."
모두가 그의 환한 웃음과 자신감에 집중할 때,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이면을 보려 노력해 주면 어떨까요. 그 성공을 위해 그가 홀로 견뎌냈을 수많은 밤들,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 그리고 어쩌면 이 성공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 미세한 불안감까지도요.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이렇게 한마디 덧붙여주는 겁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들었어." 그 순간, 우리는 수많은 '축하객'들 사이에서,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작은 발견
가장 깊은 관계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넘어, 그 기쁨 뒤에 숨겨진 슬픔까지 껴안을 때 완성되는 것 같다. 모두가 그의 성공에 박수 칠 때, 우리는 그의 보이지 않는 상처에 조용히 손을 얹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쓰다 보니, 결국 정답은 하나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관계'라는 도시에는, 애초에 완벽한 설계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서로의 서투른 설계를 묵묵히 지켜봐 주고, 때로는 기꺼이 불편한 의자가, 때로는 따뜻한 소음이 되어주며, 그렇게 함께 낡아가는 것뿐이겠죠.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생각들이, 당신의 복잡한 관계에 명쾌한 해답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그저, 당신이 오늘 밤 누군가의 잔을 채워주기 전에, 잠시 한번 떠올려볼 수 있는 작은 '생각의 조각'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결국, 소주잔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 당신의,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담아낼 준비가 된 채, 늘 '텅 비어있기 때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