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가치들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내가 바라보는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꽤나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보니 본디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언젠가부터 그 모습 속에 나를 끼워 맞추기 시작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어쨌든 내가 원하던 모습과 조금은 비슷한 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본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사유하는 것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된 것들에는 대체로 명확한 답이 존재했고, 내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가려놓은 천을 벗겨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명백한 것들만을 좇았다. 명백하지 않은 것들은 세상을 설명하는 데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어왔다. 그렇게 감성을 배제한 채 이성만으로 바라본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다채로운 듯하면서도 지루했다.
굳게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린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스스로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다 생각했던 이성의 껍질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삶에 의미에 대한 질문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끈질기게 쫓아왔다. 그렇게 과학적 원리로 구성된 '객관적인 세상'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주관적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세상은 명백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어서, 지금까지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로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을 뜯어 관찰해보기만 했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라는 미션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 무렵 나의 세상은 이루고 싶은 꿈, 커리어 같은 큼지막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빈 집의 가구와 같은 것이라서, 삶을 살아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어주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가구들만 즐비한 집은 살아가기 위한 공간은 될지언정,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공간은 되기 힘들다. 오히려 집을 생존공간에서 '나만의 공간'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이나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내 세상에 필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져다 놓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막상 실천에 옮기려 하니, 좋아하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아 가져다 놓을 것이 별로 없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여전히 즐겁지만 그것만으로 내 세상을 채우기에는 빈 공간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좋아해 보고 싶어졌다.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주위의 모든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해보고 싶어졌다. 삶과 죽음처럼 심오하고 근본적인 것들보다 당장 눈앞의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작은 것들에도 웃고, 울고, 감동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지금보다 많은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면 내 세상을 더 예쁘게 잘 가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진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도, 때로는 과학적 원리보다도 아름다움을 먼저 볼 수 있는 사람. 말로, 머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삶의 의미를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 발치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정말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좀 어때.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