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문이라는 개념 정리
고객 서비스본부에 있던 변 과장은 사내공모를 통해 디지털 사업본부로 옮겨왔다.
그는 ‘갈망’이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 정도로 이 본부에 오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대다수 젊은 주니어급 과장이 디지털 사업본부에서 근무하고 싶은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AI 분야를 비롯해 emerging technology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
요즈음에는 이놈의 AI를 빼고는 도대체가 대화를 선도해서 이끌어가기가 쉽지 않다.
또한, 디지털 본부는 회사 업무와 밀접할 수밖에 없어 지금도 향후에도 대세라고 일컬어지는 부서다.
거기다, 혹시라도 어떤 변화 또는 불가피한 상황이 도래하여 타 회사로 전직할 경우, 디지털 업무 경력은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달고 면접관 앞에 당당히 서는 모양새.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감이 뿜뿜 뿜어져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는 미국에서 인공지능 분야로 학위를 받고, 글로벌 기업에서 최첨단 분야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그야말로 글로벌 전문가를 영입하여 한 본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본부에서 근무할 직원을 사내공모in-house job posting방식과 외부출신 경력직원으로 충원할 예정이었다.
내일이 마감인 사내공모를 앞두고 입사 동기 둘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각자 견해를 드러낸다.
먼저 오 과장은,
“야, 그 디지털 부문 공모는 매력적이긴 한데, 내 커리어가 좀 걱정이야. 나는 마케팅 분야로 이 회사에서 커 왔는데... 장래를 생각하면 그쪽이 더 유리할 것 같기도 하고. 변 과장, 네 생각은 어떠냐?”
“글쎄, 아직.. 뭐 딱히 생각해 둔 건 아니고...”
“너는 관심조차 없구나. 내가 지원하는 건 어떨까?”
“야! 소나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거야. 너 거기 가봐야 당근 개고생이지. 전문가라고 하는 외부 출신 직원들이 판을 칠 텐데 네가 무슨 수로 버틸래.”
그토록 단호하게 싹둑 잘라서 말하는 변태혁 앞에 동기 오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라고 발을 뺀다.
하지만, 정작 변 과장은 이미 사내공모 지원서에 빽빽하게 자신이 선발되어야 하는 이유와 향후 계획서를 촘촘히 적어서 해당 부서에 메일 발송을 완료한 상태.
또한, 인사 부서 황 팀장에게 대학 후배 한 번 키워주는 셈 치고 도와달라고 통사정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는 동문 황 선배에게,
“선배님이나 저나 회사에서 기댈 곳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뭐래도 대학 선후배 사이인데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 어느 누가 우리를 도와줍니까? 선배님, 이번 한 번만 제대로 도와주십시오. 제가 언제 한번 크게 갚겠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작업’을 통해 과장 T/O 한자리는 변 과장에게로 돌아갔다.
동기 오 과장을 비롯한 수많은 직원들은 사내 메일 게시판의 인사명령 발표문을 보고 황당해했다.
이에 대해, 변 과장은 본인은 아무 관심도 없었다며,
그런데 인사부서에서 공모 마감일 오후에 갑자기 적임자라고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얼결에 지원서를 제출했다며,
본인도 자신이 선정되어 당황스럽다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더니 태연히 이삿짐 박스에 개인 짐을 싣고 나르기 시작했다.
디지털 사업본부는 총 열 명의 인원으로 출발하였다.
본부장을 비롯한 여섯 명은 외부 출신, 오 팀장 포함 네 명이 내부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회사에서 본부에 요구한 미션은,
디지털 사업에 대한 기본개념과 글로벌 또는 국내 트렌드를 전사全社적으로 전파할 것,
회사에 축적된 업무 노하우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 또는 접목시킬 것,
각 사업단위별로 디지털 개념을 가미하여 업무 효율화를 추구할 것, 등이었다.
이 지침에 따라 열 명 전원이 본부장을 중심으로 각자 사업영역을 나누어 업무분석과 활용방안에 몰두하기 시작할 즈음,
갑자기, 인사이동을 통해 전 직원 중에서도 최고 고참이라고 할 수 있는 P부장이 디지털 본부로 발령을 받는다.
모두 의아해한다.
‘이건 뭐지?’ 확인 결과,
회사는 지난 명예퇴직 신청 시에 불응하고 계속 근무하겠다는 부장급 직원 일곱 명을 과거 관행대로 지방 영업점으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S사장은 성격이 독특했다.
그는 회사에 부임하기 전 업계에서 별명이 ‘S대리’였다. 대리가 할 일까지 모두 직접 챙겨서 일한다고 붙어진 별칭이다.
그는 일곱 명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그건 마치 CEO가 즉시 그리고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듯 만사를 제쳐두고 부장들 처리에 골몰했다.
드디어 사장은 고임금 직원들이 영업점에서 노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씩씩거리더니 그분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신기술, 데이터베이스, 전산 관련 부서로 한 명씩 보내버렸다.
생존은 각자의 몫이라면서 험지도 아닌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P부장이 최첨단 부서로 발령 난 배경이다.
얼결에 받은 P부장을 두고 외부 출신 본부장은 황당해했다.
누가 그를 맡아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쪼임’으로 본인이 못 견디고 자진 퇴사하도록 유도하냐가 중요했다.
본부장은 누구에게 들었는데 그 일에 적임자라면서 막중한 과업을 변태혁 과장에게 부여했다. 그가 회사 내 최고 선배인 P부장의 디지털 분야 교육 담당자가 된 것이다.
다른 직원이라면 길길이 날뛸만한 일. 하지만 그는 두말없이 회사에서 원한다면 맡은 임무를 수행하겠다며 쿨하게 받아들여 본부장 시름을 덜어 주었다.
그리고 회사가, 정확히는 심술궂은 사장이, 원하는 목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거기에 적합한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한 교육 일정표를 작성한다.
그 후, 새로 발령받아 자리를 옮긴 P부장과 대면했다.
그는 디지털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접근하는데 필수라고 하면서 엑셀, D/W(data warehouse),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프로그램을 초급, 중급, 고급과정으로 구분하여 책 내용을 강의하고, 실습을 시키고, 테스트를 반복했다.
15년 전부터 부서장을 맡아 엑셀 초급과정도 힘겨워하는 P부장에게 각종 함수와 수식이 적용되는 엑셀 중급, 고급 과정과 각종 쿼리query가 사용되는 D/W의 숙달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오십 대 중반 나이에 노안까지 겹친 P부장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였다.
직원들로부터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인사부서에서는 노동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각 부서가 알아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라며 애써 모른 척했다.
반면, 각자 한 명씩을 할당받은 여섯 본부는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사장의 독특한 심기와 직장 선배에 대한 인간적 예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엑셀 초급과정을 반복 학습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변태혁은 달랐다.
그는 사장 의중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장과 같이 야비한 인간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성적인 동정은 배부른 직원이나 서툰 아마추어가 하는 짓.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아주 사무적이고 낮고도 건조한 목소리로 P부장 눈을 마주 보면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정한 교육프로그램 이수를 강요했다.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았고, 새어나갈 여지는 없었다.
그토록 힘든 과정을 거치며 늦은 나이에 팔자에도 없는 엑셀 중급과정을 마친 그에게, 변 과장은 다음 주부터는 엑셀 고급과정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툭 던지듯이 말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엑셀 하고도 고급과정을 말이다.
“잠깐만요, 변 과장님!”
P부장이 잠시 주저하며 과장을 부른다.
그는 어제 변 과장을 AI팀으로 발령 내 준 대학 후배인 인사부서 황 팀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팀장은 P부장과 서로 오랜 기간 아는 사이로 현재 상황을 무조건 외면하기도 어렵지만, 사장 의중도 있고 해서 자신이 나서기는 곤란하다며 발을 살짝 뺀다.
그리고는, 조언이랍시고 변 과장이 동문, 선후배를 몹시 챙기는 편이니 그쪽으로 접근해서 풀어 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P부장은 변 과장과 동문이기는 하지만 원체 나이나 학번 차이로 그간 눈인사나 겨우 하던 사이였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렵지만 간절하게 황 팀장 조언에 따라 우물쭈물 한마디 한다.
“저, 변 과장님! 그래도 우리가 같은 대학 동문 사이인데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뭐 후배님 덕을 보자는 건 아니지만, 다른 본부와의 형평성을 봐도.... 후배님이 너무 좀 그렇습니다. 후배님도 좀.... 그래도 선후배 사이인데...”
반응은 한 박자 늦게 왔다.
여러 차례에 걸쳐 ‘후배님! 후배님!’ 소리를 들은 변 과장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마디만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사회입니다. 사회! 왜 자꾸 후배님! 후배님! 하시죠. 공사公私구분 없이.”
순진한 선배는 변 과장 머릿속에 존재하는 ‘대학 동문’이라는 개념은 오직 자기에게 필요한 때에만 적용된다는 나름 일관된 원칙을 알리가 없었다.
그는 얼음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눈인사도 없이 칼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린 후배 뒤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평생 직장생활에서 당해보지 못한 수모를 견디지 못한 채 퇴사를 결정했다.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난번 명퇴금과 동일한 금액을 떠나는 P부장에게 안겨 줌으로써 혹시 모를 평생의 한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회사 측은 이 과정에서 하나 더 얻은 게 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변태혁이 구조조정이나 인원감축 분야에서 꼭 필요한 인재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는 점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