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하나 쉽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물음표 가득한 영화
“전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 오빠를 도우라고 심장이 시켜요.”
법정에서 끌려나가기 직전, 안티고네는 이 한 마디를 남긴다. 그녀를 보기 위해 모여든 그녀 또래의 청소년들은 그 말에 환호성을 내지른다. 평범한 17살 소녀 안티고네가 저항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영화가 원작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는, 죄인이라는 이유로 죽음 후의 장례 의식을 금지 당한 작은 오빠의 장례를 치뤄야 한다며 왕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권력에 홀로 맞선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물로서 안티고네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저항의 상징과도 같다.
장우재의 연극 <미국 아버지>에서 메타포로 사용되는 안티고네 역시 거대 권력에 반발하며 사랑과 평화, 자유를 외쳤던 미국의 68세대를 대변한다. 이처럼 안티고네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저항의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고, 이 영화의 안티고네 역시 그런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다만 이 영화 <안티고네>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덧붙는다. 이 영화의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저항일까?
사람들은 오빠 대신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오빠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안티고네를 따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그녀와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거나 빨간색 패션 아이템을 착용한 채 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게시한다. 안티고네가 갇혀 있는 구치소 앞을 찾아오거나, 안티고네의 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정 앞에서 소란스럽게 시위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지 나는 의문이었다. 안티고네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 타인들은 그저 즐거운 얼굴로 웃으며 시위를 하고, SNS에 게시물을 업로드하고 있었다.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국민을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힘겹게 캐나다에 건너와 최선을 다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총에 큰오빠를 잃고 그 누명을 작은오빠가 덮어쓴 안티고네의 처지와 심정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애도할 수 있었을까?
안티고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과정은 힙합 음악과 함께 각종 SNS 화면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면서 신나는 분위기, 그리고 소위 말하는 ‘힙한’ 분위기로 연출되었는데, 이는 마치 안티고네를 응원하는 것을 그저 유행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가벼운 마음가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큰오빠의 죽음이 담긴 영상이 인터넷에 업로드 되고 사건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과정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경찰의 총에 사람이 죽은 상황에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그 어떤 분노에서도 슬픔과 같은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뻐하는 안티고네를 보며 마냥 함께 기뻐할 수 없었다. 안티고네의 희생이 그저 대중 문화의 일부처럼 소비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대중의 가벼운 태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안티고네의 저항 자체에도 정당성 여부의 문제가 생긴다. 안티고네가 목숨을 걸 각오로 지켜낸 작은오빠는 무고한 사람이 아님이 밝혀진다. 죽임을 당한 피해자로만 여겨졌던 큰오빠 역시 무고하지 않다. 두사람은 갱 집단 소속으로 진짜 무고한 이들에게 피해를 끼쳐온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결론적으로 범죄자들을 법의 심판으로부터 지켜주려 하다 똑같은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의 ‘저항’은 얼마나 정당하고 당당한 것일까? 그저 ‘우리 오빠는 잘못이 없어요’ 하는 어린아이의 억지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까지 생긴다.
이 영화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안티고네의 의중을 전부 파악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오빠들이 범죄자였던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빠를 지켜주려 하는 마음을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엔 오빠를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안티고네라는 인물 역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안티고네는 자신을 포기해가면서 가족을 위해 행동하는 한편,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연인과 함께 풀밭에서 즉흥적으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때로는 성인(聖人) 같기도 하고, 때로는 지극히 평범한 17살 같기도 하다.
죄를 감싸주었는지,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무고한지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안티고네는 이 서사의 가장 분명한 피해자다. 오빠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간 것은,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기에 사랑하는 오빠를 둘이나 잃을 수 없었던 막내동생이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다만 가족에 대한 사랑 뒤에 묻혀버린 안티고네라는 사람의 온전한 인생과 그녀의 선택에 대한 평가를 쉽사리 내릴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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