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사람, 노동 운동과 삶에 관한 부조리극
* 이 글에는 극단 고래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글에 포함된 모든 사진 자료는 극단 고래 측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의미한 대화만 계속하는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도, 지나가는 이들도, '고도'가 보냈다는 소년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두 남자의 유일한 목적은 실체도 모르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도, 특별한 사건도, 줄거리도 없는 듯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부조리극은 겉으로 보기엔 말이 되지 않는, 즉 부조리한 상황과 대사들을 통해 '부조리함'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같은 연극이라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두 명의 남자가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도 같으며 대사의 흐름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굴뚝을 기다리며>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는 존재는 고도가 아닌 '굴뚝'이다.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
왜 하필 '굴뚝'일까? 그 이유는 객석에 앉자마자 알 수 있다. <굴뚝을 기다리며>의 무대는 높은 굴뚝 위다. 구석에 설치된 작은 천막과 오줌이 담긴 수십 개의 페트병들, 그리고 발코니에 가득 놓인 화분들. 무대, 그러니까 굴뚝 위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 머무르고 있는 흔적이 가득하다. 그들은 극을 이끌어가는 두 사람, 누누와 나나다. 두 사람은 고공 농성 노동자다.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공연을 보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다만 <굴뚝을 기다리며>는 노동 운동을 다루며 현실을 고발하기보다는 노동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인간다움'에 더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누누와 나나는 열악하고 참혹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굴뚝에 올라있지만, 그들은 결코 위대한 영웅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도리어 두 사람은 70m나 되는 굴뚝을 한 발씩 오를 때의 숨 막히는 두려움, 혼자 남겨지게 된다면 닥쳐올 지독한 고독과 같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누누와 나나가 왜 농성을 이어가야 하는지, '굴뚝'의 존재는 정말 있는지에 관해 대립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모든 조명이 꺼진다. 극장에 내려앉은 암흑 속에서 목소리로만 이어지는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라기보단 한 사람의 내면의 대립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연극은 노동 운동가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내면을 묘사하는 데 더 집중한다.
뿐만 아니다. 연극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잊어버린' 두 사람이 계속해서 버틸 수 있게 지탱해주는 힘은 바로 노동자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한 발 더 나아가 고공 농성에까지 이르게 한 부조리하고 힘겨운 현실, 그것을 만들어낸 것조차도 결국엔 인간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연극이 아니었다면 노동 운동에 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갔을 나를 비롯해, 노동 운동의 현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때로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 역시 같은 '사람'임을 일깨워준다.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한편 <굴뚝을 기다리며>는 '노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 또한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누누와 나나 외에 첫 번째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소'다. 그는 이름답게 굴뚝 청소 일을 하는 노동자다. '청소'는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일을 "신성하다"라고 평가한다. 이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씁쓸한 합리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청소 로봇 '미소'다. '미소'는 '청소'를 대체하는 존재로, 노동 시장에서 기계의 인력 대체, 노동의 기계화에 관한 화두를 던지는 캐릭터다. 연극은 '미소'를 통해 노동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연극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나 인공 지능 등이 인간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지, 즉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득이 되는지 혹은 해악이 되는지에 관한 오랜 질문 또한 함의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소'라는 어린 여성이다. 라이더로 보이는 차림을 한 '이소'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소년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파트타임과 계약직 형태인 경우가 많은 젊은 세대의 노동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작품을 쓴 이해성 연출은 '이소'의 캐릭터를 통해 불안한 노동의 현실과 더불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가득한 현대 사회를 향해 분노를 품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이처럼 다양한 노동의 양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노동'이라는 대주제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사회 문제들까지 포용한다. 더불어 노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빼놓지 않는다. '청소'의 노동이 과도하고 위험한 것이었다면, '미소'로 인해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진 '청소'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광합성을 통해 자라나고 열매를 맞는 식물들의 노동이 광합성이라면 어둠 속에서 광합성, 즉 그들의 노동을 멈춘 식물들은 과연 행복할까.
연극은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 또한 하고 있다. 극의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누누와 나나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의 격렬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서글퍼 보이면서도 온 힘을 다해 열정을 불태우는 움직임. 어쩌면 노동은 인간의 삶 그 자체와 굉장히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답은 각자에게 있다
<굴뚝을 기다리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극 전반에 깔려 있는 시니컬함이었다. 물론 부조리극은 기본적으로 염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이 연극에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극을 관람하다 보니 문득 내가 이 연극에서 무엇을 예상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부조리극이 갖는 특유의 냉소는 노동 운동을 둘러싼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던 이들의 이야기가 삶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면, '굴뚝'을 기다리는 두 사람은 본인들이 이어가는 노동 운동에 관해 본질적인 의문을 표한다. 노동 운동권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품게 되는 그런 의문들을 대신 표해주는 듯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듯, '굴뚝' 역시 마지막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굴뚝을 기다리며>의 기다림은 조금 더 간절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인물들의 괴로움이 더 세밀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극의 가장 마지막에 이르러, 암흑 속의 대립 끝에 누누는 굴뚝 밑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굴뚝 위의 삶이 너무 괴로웠던 탓이다. 그러나 굴뚝 밑의 삶은, 누누가 굴뚝에 올라서라도 바꾸고 싶어 했던 바로 그 현실 속 삶이다. 그의 괴로움은 어디에서든 옅어지지 않는다.
나나도 마찬가지다. 누누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나나는 굴뚝 위에서 겨울을 맞는다. 그는 똑같은 일상을 매일같이 반복한다. 처음엔 그저 규칙적인 생활처럼 보였던 그의 일상 루틴은, 이내 어떻게든 굴뚝 위의 시간을 이겨내려는 간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즈음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극장 가득 울려 퍼진다. 곡의 장엄함은 굴뚝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며 대의를 위한 것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무대 위 홀로 남은 이의 괴로운 모습을 객석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그저 서글플 뿐이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이처럼 노동자의 부조리한 현실을 부조리극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내어 노동 운동, 그리고 노동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극을 관람하다 보면 단순히 노동 운동의 열악함에 서글퍼지는 것을 넘어, 노동과 노동 운동의 가치에 대해 자연스럽게 고민해 보게 된다.
그 가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가치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동등한 값을 가진다. 특히 연극을 비롯한 예술에서는 바로 그 '수평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해성 연출이 밝혔듯, 노동 운동과 같은 사회 문제와 일반 대중 사이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연극, 그리고 예술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가치 덕이 아닐까. 노동이든, 노동 운동이든, 노동 운동의 시작점이든, 결국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되니 말이다.
* 위 글은 <굴뚝을 기다리며>의 프레스콜 및 기자간담회에 초대받아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좋은 작품을 조금 더 일찍 관람할 수 있도록 귀한 기회를 주신 '극단 고래' 측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