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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 Aug 08. 2021

나는 나로 살 것이다, '모던걸 백년사'

백 년을 거스른 두 여성의 이야기가, 객석에 닿기까지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은 환상적인 장르다.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많은 뮤지컬 작품들의 서사는 환상에 기반한다. 뮤지컬 속 인물들은 시간 여행을 하거나, 일상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기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일을 마주한다. 일단 인물이 평범하게 대사를 하다가, 갑자기 이어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컬의 기본 설정 자체가 환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모던걸 백년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뮤지컬"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극 중 남성 인물이 지나가듯 던지는 대사, 여성 인물들이 한숨처럼 내뱉는 대사들이 훅훅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살면서 한 번쯤은 해봤고, 한 번쯤은 들어봤던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가능한 한 외면하고 싶기도 한 이 이야기는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만나 비교적 가볍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본질은 잃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냐고? 여성들의 이야기다. 192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여전히 세상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야지만 내가 나로 바로 설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모던걸 백년사'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이 뮤지컬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외친다. 우리는 우리로 살고 싶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말이 결코 당연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내 무대에 펼쳐진다.






우선, 경희가 있다. 이름부터 왠지 '나혜석'을 떠올리게 하는 나경희는, 1920년대의 신여성이다. 경희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신식 교육을 받은 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상태다. 그러나 경희가 동경에서 배운 것은 단지 학문적인 지식만이 아니었다. 자유로움, 주체성, 나로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경희는 잡지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고, 사랑이 없었던 남편과의 이혼을 준비한다. 


그런 경희에게 세상은 '모던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모두들 당시의 여성상을 탈피한, 괘씸하고 콧대 높은 여자라며 경희를 공격한다. 경희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경희의 편이 되어주었던 한 남자조차도 경희를 말린다. 그러나 경희는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희곡 '인형의 집'의 조선어 번역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2020년에는 화영이 있다. 여자는 교사가 제일이라는 주변의 말을 따라 교직이수를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 혼자 희곡을 써보기도 하지만, 화영의 글을 읽은 남자 선배는 멋대로 잣대를 들이댄다. 불쾌하게 추근거리는 선배를 밀쳐내지도 못할 만큼 자신감도 삶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던 화영은, 희곡 '인형의 집'을 만나 문득 뭔가를 깨닫는다.


그런 화영에게, 시련이 닥친다. 자신도 모르는 새 찍힌 자신의 사진이 연극 동아리 내 남자 회원들의 단체 메시지방에서 떠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화영은 폭발해,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하지만 쉽지 않다. 처벌은 너무나도 미미하고, 세상의 손가락질은 되려 화영을 향한다. 화영이 감내해야 했던 모든 어려움은 '예민함'으로 치환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화영의 가까운 친구조차도 화영에게 현실의 벽을 먼저 상기시킨다.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화영은 더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다. 


경희와 화영에게는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공통점이 있다. 여성으로서 세상이 씌우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 맞섰다가, 처참히 공격받고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버림받는 아픔은 덤이다. 나는 그저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겠다는데, 세상이 가로막는 셈이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세상은 그걸 유별나게 여긴다. 그것이 백 년 동안 이어져온 여성의 삶임을, '모던걸 백년사'는 경희와 화영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비슷한 점이 많은 두 사람이니만큼, 둘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 몇몇 장면의 연출이 두드러진다. 경희와 화영이 함께 희곡 '인형의 집'을 읽으면서, 노라의 남편으로 표현되는 당대의 남성들에게 노라의 대사로서 맞서는 장면은 경희의 상황과 겹쳐지고, 화영에게는 자각의 계기가 된다. 또한 무대 한편에서 경희가 이혼 고백서를 쓰면, 화영은 맞은편에서 자신의 사진을 몰래 촬영한 연극부 남성 회원들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내건다. 이어 두 사람은 각자의 일로 좌절을 겪지만, 함께 무대에 올라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목이 터져라 다짐한다. 





백 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두 사람은 지극히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이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어쩌면 우리가 단순히 무지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양성 평등의 개념이 도입된 지 한참 지난 이 시점에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백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무지했다기보다는 무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테다. 알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일'을 고민하기 위해 뒷전으로 미뤄두었을 수도 있고, 매일같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 하나 나선다고 달라질 것 없다는 무력감에 애써 외면해왔을 수도 있다. 


나는 후자다. 여성이라는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편견들을 알면서도, 그 편견에 상처 입고 영향을 받으면서도 애써 무시해왔다. 한번 인지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생겨날 물음표들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것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여성들에게, '모던걸 백년사'는 따뜻하게 말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함께하고 있다고.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화영이 자신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극 중 화영처럼, 나도 처음으로 누군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뮤지컬로서의 '모던걸 백년사'라는 작품은 조금 아쉽다. 음악이 이야기를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인데, 현재 '모던걸 백년사'의 넘버들은 뮤지컬 음악으로서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더불어 경희의 로맨스가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느낌이 적잖이 있어, 뮤지컬이란 장르의 로맨틱한 요소를 갖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장면이 삽입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경희와 화영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교차되는 장면이 있으면 감동이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음악극이나 연극의 형식이었어도 충분히 재밌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모던걸 백년사'의 이야기가 이미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서사적 재미도 있을뿐더러,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와 같은 여성에게도, 혹은 성별을 막론하고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도 '모던걸 백년사'는 꼭 필요한 이야기를 전한다. 강렬하지만 담담하게 전한다. 돌직구로 할 말을 외치지만, 그 속에 감정의 과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인물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귀담아듣고, 더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이런 이야기가 무대에 올라 관객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모던걸 백년사'의 외침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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