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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 Jan 05. 2022

80년대의 영국과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는 '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 기념해요, 오늘을! 다가오네, 당신의 죽음!”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건 맞는데, 죽음을 기념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이는 놀랍게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2막의 첫 넘버*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의 가사입니다.

(*넘버: 뮤지컬을 위해 작곡된 곡 혹은 뮤지컬에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음악을 통칭)


출처: 신시컴퍼니 트위터 @i_seensee


<빌리 엘리어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발레를 꿈꾸는 빌리의 모습은 우리가 처음 꿈을 꿀 때의 벅찬 마음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또한, 마을의 어른들이 최선을 다해 빌리의 꿈을 지켜주는 모습이 감동을 안겨주죠. 빌리 역을 맡은 10대 초반의 어린 배우들이 선보이는 뛰어난 퍼포먼스와 연기는 덤이고요.


이처럼 따뜻한 작품에, 위와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좀 충격이죠. 저 역시 공연을 처음 봤을 때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는데요. 그렇지만 작품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런 노랫말이 흘러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영국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일 겁니다. 앞서 언급한 '매기 대처'가 바로 이 사람인데요. 아마도 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은 거의 없을 거예요. ‘철의 여인’이라고 불릴 만큼 임기 내내 강력한 지도력으로 수많은 정책을 펼쳤고, 이는 당시 ‘영국병’이라고 불릴 만큼 심각했던 영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침체를 극복해낸 ‘대처리즘’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처리즘을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어요. 대처는 산업 구조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영국 산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탄광 산업을 전부 국유화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탄광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맞서죠. 이것이 바로 <빌리 엘리어트>의 주된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영국 탄광촌 더럼의 영국 탄광 노조 파업입니다. 극중 탄광 노동자들이 대처 총리의 죽음을 기념하는 파티를 벌이게 되는 것이 엉뚱한 전개가 아닌 이유죠.


출처: 신시컴퍼니 블로그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 스크린에는 석탄 국유화를 발표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다음 장면에서 탄광 노동자들은 파업의 의지를 다지는 ‘The Stars Look Down’을 부릅니다. 이 제목은 영국 탄광촌의 현실을 심도 있게 다룬 A.J. 크로닌의 <별들이 내려다보고>란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파업을 이어가지만, 결국 대처 총리의 비민주적인 진압 앞에 실패하게 되는데요. <빌리 엘리어트> 2막의 후반부 ‘Once We Were Kings’라는 넘버는 웅장한 선율과 합창을 통해, 성패를 떠나 끝까지 굳건했던 그들의 의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합니다. 더불어 노동자들을 비추는 강렬한 빛과, 발레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떠나는 빌리의 그림자 같은 뒷모습을 교차하는 연출을 통해 파업에는 실패했지만 빌리의 꿈은 성공적으로 지켜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또한 이처럼 <빌리 엘리어트>에는 발레를 향한 빌리의 꿈과 파업 성공을 향한 노동자들의 꿈이 교차되는 장면이 많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넘버 ‘Solidarity’의 연출이 있습니다. 발레 수업을 듣는 아이들과 시위 중인 노동자들, 시위를 진압하러 온 경찰들까지 한 데 모여 입체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아이들이 노동자들과 경찰들의 모자를 서로 바꿔 씌워주고,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다 함께 ‘연대(solidarity)’를 노래하는 순간은 정말 가슴이 벅차기도 하죠.


출처: 신시컴퍼니 트위터 @i_seensee


이처럼 <빌리 엘리어트>는 한 소년이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뤄내는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당시 영국 사회의 일면을 심도 있게 다루는 시대적인 이야기입니다. 내년 2월 2일까지 서울 대성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나보실 수 있으니, 관심이 생기셨다면 관람을 추천드려요:)






이 글은 '문화소비리포트'의 시즌 4 뉴스레터에 실려 지난 12월 25일에 발송되었습니다. '문화소비리포트'는 문화예술 콘텐츠 큐레이션 뉴스레터로, 실내외에서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소개하고 추천합니다. 저는 시즌 2부터 합류해, 연극과 뮤지컬 담당 에디터로서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11일부터 '문화소비리포트'의 시즌 4가 시작됐습니다. 다시금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마다 구독자 분들의 메일함에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1월 8일에는 90년대를 담은 연극과 뮤지컬에 관해 쓴 저의 글이 발송될 예정이니, 흥미가 생기셨다면 아래 링크에서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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