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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y 05. 2019

여성을 위한 계몽주의는 없다

칸트 철학은 여성주의적인가 여성주의의 적인가 -1-

계몽(enlightenment)의 뜻을 풀이하면  ‘밝히기, 불을 켜기’이다.


볼테르의 뉴턴 소개서 속표지. 뉴턴주의 지식을 몽매(어둠)을 깨우치는 빛(계몽)으로 비유했다

계몽이라는 단어는 무지(無知)라는 어둠 걷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기초가 담겨있는 계몽시대라고 하면 대체로 17, 18 세기의 유럽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들은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에 집중함에 따라 자연과학, 인문학, 예술 등 사회 다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 중 자연과학의 발전이 사람들의 사고 및 삶의 방식에 미친 영향은 굉장히 거대했다. 


계몽주의 물리학자의 대표격인 갈릴레오, 뉴턴, 케플러(왼쪽부터)


 고전 물리학이 틀이 잡힌 이래로 사람들은 이 자연 세계를 필연적 인과법칙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일단 인과적 ‘힘’들을 발견하면 이를 통해서, 힘이 관여하는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정의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논리와 논증에 대한 확신은 인간 이성의 힘과 경험을 믿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성(reason) 및 경험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 및 사회의 끊임없는 진보와, 인간 스스로의 행복할 가능성에 대하여 낙관론을 갖게 했다. 계몽기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발전은 오로지 인간의 이성적 사고(思考)와 경험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하나의 인생관 및 세계관적 철학의 방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업적을 신봉하고 이 업적을 삶에 적용하려는 의지는 계몽주의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 계몽주의는 신앙처럼 사람들에게 받들어졌다.

 

계몽주의 시대, 칸트는 지성의 거장이라 할만 했다.
젊은시절 칸트의 초상

칸트가 태어나서 주로 활동한 시기는 18세기이다. 이 시기 역시 계몽주의, 자유주의의 사상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고 이러한 물결은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프로이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수많은 연구자 및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적 관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각자만의 이론들을 앞 다투어 만들어 냈고, 이는 철학 및 윤리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 당시의 지식인들은 무지한 대중을 깨우쳐주어야 한다는 사명의식에 의거해 계몽운동을 펼쳤고, 과거 시대의 귀족 엘리트집단의 특권에 저항하며 평등한 권리와 자유를 주창하였다. 칸트의 시대는 다시 말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커져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인간의 이성의 능력과 윤리, 권리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이어졌고 칸트도 이 시대의 뛰어난 철학가 중 하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칸트뿐만 아니라, 밀, 루소, 로크 등의 수많은 내로라하는 사상가들이 탄생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 왼쪽부터 루소, 밀, 로크


계몽 속에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는가?


자, 계몽시대에 대한 묘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앞 문단을 요약하자면 계몽시대는 인간의 지성이 꽃피우던 시기라는 말인데, 과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인간이 정말 인간 전체를 뜻하는 것일까? 언급된 철학자 중에서 여성이 있는가? 아니면 언급되지 않은 철학자들 중에서 모두가 알만한 계몽시대 여성 철학자가 있는가? 구석구석 살펴보면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그 여성철학자는 오늘날 회자되면서 인류의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남성 철학자들에 비해서는 그 명성과 영향이 미미하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몽시대의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써 내려가며 세상을 바꾸는 야망을 꾸고 있는 동안에 여성들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등해서 남성 지식인만큼 뛰어나고 유명한 여성 철학자가 없는 것일까? 여성은 아무래도 숙고하고 탐구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꾸미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일까?  앞의 두 질문에 대해서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이 책을 덥고 잠이나 자길 바란다. 만약 당신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또 질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지성의 시대에 여성 철학자, 여성 연구인, 여성 지식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계몽 시대의 여성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지워버렸을까?”

18세기 프랑스 복식. 당시에 사회에서 요구되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성별이 더 오래걸리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는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답을 하자면 이와 같다. 우선 여성은 지식과 정보에의 접근성에 있어서 남성들보다 훨씬 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여성에게 고등교육은커녕 글자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시기였다. 똑똑한 여성은 당시에 가장 ‘여성적이지 않은 여성’이었다. 때문에 가난한 서민들이야 금전적 이유로 교육을 못 시켰다고 치더라도, 여유가 넘치는 상류층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교육은, 결혼하기 위한 신부수업 정도에 그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만에 하나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고 지적으로 뛰어나 언변에 능하고, 논리적이면, 그녀는 시끄러운 여자, 조신하지 못한 여자로, 최악의 결혼상대로 전락해 버렸다. 당시에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재산 상속에서도 불리하고, 직장에 나가서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시대 여성이 생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바로 결혼이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결혼상대로 여겨졌던 ‘똑똑한’ 여자들은? 변변한 생존의 수단도 없는 채 사회에서 버려지는 것이다. 생존의 수단도 없는 사람이 지적 탐구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이다. 이에 반해 당시의 많은 남성 학자들의 경우 생존의 수단을 마련하기도 쉬웠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들은 허구한 날 생각만 할 자유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자를 위해 잡다한 뒷바라지를 해줄 여성(아내, 가정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 사회는 철저하게 뛰어난 여성의 존재를 방지하고 억압했고 그들에게는 오직 남성을 빛내기 위한 부수적 위치만이 허락된 것이다.


종종 학자들의 부인 이야기, 애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 중에는 꽤나 사랑꾼들도 있었다. 이 남성 철학자들은 그들의 애인이 자신과 지적 탐구를 함께 하고 자신들에게 지적 영감을 줄 정도로 아주 뛰어난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경우 이 남성학자들이 애인에게서 사랑한 부분은 흥미롭게도 이러한 그녀들의 ‘지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누군가의 연인으로 밖에는 남지 못했고, 특정 ‘남성’ 사상가의 뮤즈로밖에 남지 못했다.

밀과 아내 해리엇. 밀은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던 몇 안 되는 남성학자였으나, 그 만큼 뛰어났던 그의 아내 해리엇은 밀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존 S. 밀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제임스 밀. 그는 지적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신의 아내를 경멸했는데, 이는 당대의 많은 남성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계몽주의 시대만큼이나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시대에서 조차도 여성은 이성적 판단의 주체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성적 판단을 못 한다고 본다는 뜻은 다시 말해 여성이라는 존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눈부신 변혁의 시대라고 이야기하지만 여성들의 삶은 복색과 요구되는 여성성의 요소는 변했을지 몰라도, 이전시대에도 억압 속에 있었고 계몽 시대에도 여전히 억압 속에 있었음은 자명하다. 남성들이 이전시기 겪지 못했던 거대한 사상적, 관념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삶과 세상을 주체적으로 변화시켜나가고 있을 때, 여성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에서 밖에서 승승장구하는 남성들을 위해 식모가 되었고, 출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계몽의 시대에서 여성들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분명히 많은 계몽주의 ‘남성’ 철학자들이 여성에 대한 언급을 한 바가 있고, 여성 혹은 여성성을 탐구하고자 한 학자들도 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같은 여성 지식인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닌, 단지 여성 혹은 여성성을 대상으로 탐구하는 남성들의 목소리일 뿐이거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여성은 남성들의 목소리에 의해 타자화되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많은 경우 남성 철학가들이 보기에 여성은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숙고가 부족하며, 여성성은 남성성에 비해 열등하거나, 여성은 남성을 위한 부수적 존재로 묘사되고는 했다.             

당시 극히 소수 였던 여성 지식인이자, 페미니즘의 어머니로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저서로는 <여성의 권리 옹호> 등이 있다.


칸트는 여성주의 적인가 여성주의의 적인가?


"남성은 자신을 위해서 취미를 가지고, 부인은 모든 남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취미의 대상으로 만든다. "
– 칸트.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칸트가 저서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여성에 대해 언급했던 부분이다. 이러한 인용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 사상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칸트 또한 시대에 갇혀 있는 철학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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