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름차차 Apr 28. 2019

밀(J.S. Mill)의 동상에 놓인 꽃의 의미

밀은 어떻게 여성참정권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1-


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여성이 쟁취한 것이지만
밀은 그 투쟁의 길에 함께한 몇 안 되는 남성이었다.



1928년 영국에서 21세 이상의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이 인정되면서 이전까지 선거권이 없었던 21세-29세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비로소 영국은 1928년부터 연령 이외의 자격 조건을 두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Universal suffrage)가 시작되었다.


이 날, 런던 템즈 강변에 있는 밀의 동상에 꽃이 놓였다.


여성참정권이 인정된 날, 밀의 동상에 꽃이 놓였다.                ⓒ gettyimages




최초의 남성 페미니스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밀은 자유주의의 이상을 여성에게도 적용하였다.

자유주의를 지향하면서 인류의 반인 여성이 성별을 이유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침묵하는 모순을 보여준 많은 당대 철학자들과는 달랐다.


각자가 자신의 취향과 목표에 따라 자신의 성격에 맞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자유란 곧 각자가 원하는 바를 자기 방식대로(one’s own mode) 추구하는 것 그 자체이다. - <자유론>


저술활동을 통해서 지지의사만 밝힌 것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시도하고 여성참정권 운동에 헤리엇의 딸인 헬렌과 함께 여성참정권연합을 발족하며 의회 연설과 대중연설에 앞장섰다.


영국에서는 1860년대부터 여성참정권에 대한 공식적인 요구가 있었다. 1867년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밀은 2차 선거법 개정안에 '남성(man)'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람(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선거법이 선거권자를 남성으로 규정하고 있어 여성의 참정권이 완전히 배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정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868년 의회가 해산된 뒤 치러진 재선에서 밀은 낙선한다.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밀은 여러 사람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옷을 입혀 그림으로 그리거나 여성화(Miss Mill)하여 묘사하였다. 밀의 주장에 대해 밀의 논리인가? 아니면 여성을 위한 프랜차이즈인가? ( Mill's Logic?  or Franchise for Female )라고 비하하기도 하였다.





밀은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밀의 주장은 일부 여성에게만 받아들여졌다.

여성 스스로 여성참정권을 부정하는 상황에 대해 밀은 그의 저서 <여성의 종속>에서 설명한다.  종속 상태에 놓인 경우, 이 상황을 인지하기 어려우며 종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렵도록 길러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성운동권 내부도 참정권보다 여성의 다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밀은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에게도 참정권 캠페인에 동참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나이팅게일은 투표권 보다 시급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이렇게 당시 여성운동계 내부에는 여성이 처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의견이 존재하였는데 밀이 여성참정권이라는 단일 목표에 집중하느라 당시 여성운동계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에는 귀 기울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밀은 참정권이야 말로 개인이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정의라 생각하고 동시대 남성들의 조롱을 견디며 행동하였다. <여성의 종속>에서도 공화주의 원리를 설명하며 투표는 권리이게 앞서 정의라고 보았다. 입법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질 때, 여성이 처한 문제에 있어서도 법령 개정 등 보다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한 1867년에서 61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최초의 남성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천재로 키워진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180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과                                        아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제임스 밀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과 함께 사상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공리주의 철학자이자 동시에 자녀를 천재 자유주의자로 길러낸 아버지였다.


제임스 밀은 그리스어-영어사전이 없는 당시에도 3살짜리 아들에게 그리스어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고 여덟 살이 되자 라틴어를 가르쳤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원전을 읽히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고전(古典) 교육은 요즘에도 영재교육의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임스 밀은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고전의 시각을 강요하기보다 비판적 읽기와 자신만의 재정립을 강조하였다. 비판적인 읽기는 스스로 찾아내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으며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요구하는 교수법은 결국 밀을 사상가로 성장시켰다.


부자가 함께한 숲 속 오솔길 산책 시간은 그 전날 읽은 책과 외웠던 지식을 나누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의 사유는 오솔길을 수없이 걸으며 깊어졌다. 고전을 통한 영재교육과 언어교육, 동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의 학습법, 그리고 기하학과 대수학을 배우며 형성한 논리, 역사서를 탐독하고 스스로 역사서를 쓴 경험은 그를 당대의 천재로 키워내고 있었다.


아버지에 의해 천재로 양육되던 유년기를 지나 소년기에는 아버지 주위의 대사상가의 영향을 통해 도덕적 관념을 정립하게 된다. 밀의 자서전에 언급되는 아버지 지인들이란 데이비드 흄, 제러미 벤담,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 등이었다.


밀이 성장한 시기는 중세에 단절되었던 사상사가 다시 고대와 연결되고 그동안 억압받았던 인간의 이성이 폭발하는 시대였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앞에서 언급했듯 인간의 이성 그 자체였다. 근대 학문의 기틀을 마련한 학문의 아버지들과 직접 지적 교류를 하며 그 시대의 한 축을 채웠다.


밀은 당대에 가장 똑똑한 여성과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무엘 벤담의 아내는 유명한 화학자인 포다이스 박사(Dr. Fordyce)의 딸로 엄청난 지성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은 문학에 있어 여성의 영향을 확인하게 하였다. 이 부부의 딸 역시 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지성은 영국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쌔이(Jean-Baptiste Say)와도 교류하였으며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대륙의 자유주의에도 눈을 뜬다. 그가 수많은 저작에서 보여준 다양한 예시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한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인물과의 교류,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이 그의 지식과 사고의 개방성에 영향을 미쳤다.


 다름이 차별과 종속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그는 이러한 경험과 교류를  통해 깨달았다.




평생의 동반자, 헤리엇과의 만남


어떤 감정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안다고 해서 그 감정이 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내 교육은 결국 이상과 같은 고귀한 감정을 충분히 강하게 마음속에 생기게 해주지 못했고, 지적 수양의 과정은 조숙하고 미숙한 내 분석을 정신의 뿌리 깊은 습성이 되게 했다고 생각하였다.
- <자서전> 제5장 내 정신사의 한 위기 中



밀은 <자서전>에서 인생의 살 보람을 느끼지 못했던 시기를 회고한다. 그가 자서전에서 스스로 정신사의 위기로 명명한 1826년부터 1832년 사이인 1830년, 생애에 가장 귀중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정신사에 위기가 올 정도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던 당시의 밀에게 헤리엇(Harriet Taylor)은 지성과 감성을 함께 교류할 수 있는 존경할 수 있는 벗이었다.



모든 것의 대부분의 원천이자, 생애의 영광, 으뜸가는 축복



밀은 훗날 자신의 배우자가 될 헤리엇과의 우정에 대해 모든 것의 대부분의 원천이자, 생애의 영광,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기술한다. 밀이 25살이던 1830년, 헤리엇은 23살이었고 이미 존 테일러의 아내였다. 밀은 헤리엇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까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밀은 지적능력에 매력을 느끼는 사피오섹슈얼(sapiosexsual)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인 사피오(sapio)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2010년대에 등장한 신조어이지만 헤리엇을 향한 밀의 사랑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이다.


밀과 헤리엇은 20년 동안 우정을 나누고 존 테일러가 죽은 2년 뒤인 1851년 결혼한다.

밀의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결혼 이후 밀은 가족과 관계를 끊었다.



헤리엇과 밀, 둘은 함께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그 저작물은 밀의 이름으로만 남았다.



결혼 이전부터 밀과 헤리엇은 지적교류를 통해 공동 저술활동을 해 1848년  <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출간하였다. 결혼 이후에는 본격적인 공동작업을 진행하였는데 밀과 헤리엇의 사상적 교류와 토론이 집대성된 책이 바로 <자유론 On Liberty>이다.


헤리엇이 죽은 다음 해인 1859년에 출간되었는데 밀은 헤리엇의 감수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자유론>에 이러한 마음을 담았다. 헤리엇이 죽은 이후 헤리엇이 묻혀있는 아비뇽에서 딸 헬렌과 1년을 함께 살았다. 그 이후 과거 헤리엇과 함께 나눴던 여성과 시대, 역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1869년 <여성의 종속 The Subjecion of Women>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자서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밀이 뛰어난 지성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길러지고 세계 지성사를 채우는 학자들과 직접 교류하며 성장 그의 교육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열어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밀이 정작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침묵한 것은 어머니의 지성이 밀의 기대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아름다운 10살 연하의 아내와 지적인 대화가 불가능하자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James Mill)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경멸하였다. 밀의 어머니는 남편의 말에 철저히 순종하며 지적 행위보다 육아와 가사만 담당하였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수많은 남성과 여성의 지적인 근대인과 교류하며 성장한 존 스튜어트 밀의 눈에는 지적이지 못한 어머니가 어떻게 비쳤을지, 그에 대한 결핍이 헤리엇을 향한 애정으로 어떻게 표출되었을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여인 중 한 명은 그 시절 극히 평범한 여성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가져보지 못하였다. 반면 평생의 동반자는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두 명의 극단적 사례를 통해 밀은 종속적인 여성의 삶에 대해 통찰하기 시작한다.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도 어머니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남성이 요구하고 사회가 기대하는 대로 길러진 여성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고 이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다.  

 

  

     

러브스토리로 박제된 뮤즈들, 누구의 이름이 남는지는 중요하다


예술과 문학, 지성사에서 예술가와 학자, 문학가들 사이에 파트너로서 의견을 교류하는 협력관계가 많았다. 남성들은 이러한 동성 간의 의견 교류 과정에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관계가 남녀의 특히 연인이나 부부관계에서 비롯된 경우, 대부분 여성의 이름은 잊히고 그녀는 뮤즈로 박제된다. 사상가, 작가, 예술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남성에게 예술적, 지적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여신 혹은 연인으로만 기억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과 까미유 클로텔(Camille Claudel)의 관계이다. 두 명 모두 조각가로서 작품 활동에 집중하였고 공동으로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입맞춤' 등을 작업하였지만 로댕의 이름만 남아있다.


로댕과 까미유클로텔이 같이 작업한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로댕과 까미유 클로텔이 같이 작업한 입맞춤


두 사람이 완전히 같은 사상과 사색을 가지고 있을 때,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관심을 가진 문제를 더 깊게 탐구할 때,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여 공동연구로 결론에 도달할 때, 사상의 독창성을 문제 삼음에 있어 누가 붓을 들었는가 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정작 글을 쓰는 일을 많이 맡지 않은 사람이 사상 면에서는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저작은 두 사람의 합작이요, 각자 쓴 부분을 가려낼 수 없는 것이 보통이어서 이 부분을 누가 썼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내가 발표한 모든 저술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못지않게 또한 그녀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자서전> 제7장 그 후의 내 생애의 개관 中


근대에 살면서도 현대 어디쯤에 서 있던 존 스튜어트 밀도 이점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엄격한 연구윤리를 요구받는 요즘,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사람도 논문에 표기해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밀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자유론>을 헤리엇과 함께 저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밀의 <자유론>으로 기억된다.


밀은 여성의 종속을 그토록 안타까워하고 헤리엇의 지성과 사상을 찬양하였지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최초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만들고 그와 일생의 사랑을 한 여인으로 기억될 뿐이다.



누가 붓을 들었는지가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함께 저술하고 사상 면에서
헤리엇이 더 많은 공헌을 하였다면 그녀의 이름도 함께 남아야 한다.

누구의 이름이 남을 것인가는
붓을 누가 들었는지만큼  중요하다.




시대에 갇힌 철학자들 매거진에 연재한 책이 2020년 4월, 

<평등은 미래진행형: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철학>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847398


전자책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selectedLargeCategory=001&barcode=4801190149311&orderClick=LAG&Kc=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