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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l 11. 2019

칸트의 세계 시민과 여성

칸트 철학은 여성주의적인가 여성주의의 적인가 -3-

앞선 논의에서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칸트 철학의 한계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주의는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어떠한 시사점이나 배울점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보편적 권리, 인간의 보편적 자유 및 자립 그리고 자율성, 공적 자유, 자기입법, 인간의 실천, 존엄성, 도덕성 혹은 도덕적 의무,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 상호인정,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이성의 공적 사용, 공동입법, 세계시민 등의 의미를 여성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데 칸트의 철학이 아직도 의미가 있을까?


1795년에 나온 칸트의 『영구평화론』 책 표지

이 장에서 우리는 칸트 철학의 시각을 여성적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통찰력을 얻고자 한다. 칸트의 사상이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에서 분명 여성주의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상이 있다고 본다. 그 중 면밀하게 검토해보고자 하는 개념이이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언급했던 세계시민의 개념이다. 이 탐구에 대한 결과가 의미있는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면,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해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인간존재, 도덕적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 실천적인 인간존재, 비판적인 세계시민의 공론장을 구성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의 의미가 보다 풍성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은 지금, 여기 우리 안에 늘 현시(顯示)하고 있는 실체다. 관련된 여러 언급 중 하나를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해가 없는 자유, 즉 모든 국면에서 그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다. [……] 도처에 자유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한이 계몽에 장애가 될까? 어떤 것이 계몽을 방해하지 않고 촉진시킬까? 이 물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성의 공적인 사용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 있다. [……] 내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어떤 사람이 배우는 사람으로서 독서공중(reading public)에게 주장을 펴는 경우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그에게 맡겨진 어떤 정부 관직이나 업무(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특정 공동체의 이해가 걸려 있는 문제들은 어떤 기계적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정체의 성원들은 여기에 수동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인위적 공동합의에 따라 공적 목적을 위해 정부가 부과하는 바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주장을 편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기계적 장치의 일부로 행동하는 이런저런 개인이 하나의 완전한 또는 더 나아가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따라서 그의 저작을 통해 이 말의 가장 참된 의미에서의 공중 앞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배우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계몽이란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


이 인용은 매우 조심스러운 표현 속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주장을 담고있다. 먼저 조심스럽다는 것은, 국가의 업무에 관한 한 수동적인 입장과 복종의 필요를 문맥상 어색하리만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 대목을 썼던 시점은 프랑스 혁명 이전이었고 따라서 칸트가 염원했던 공화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당대의 국가체제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 자신이 후일 이 체제(프러시아 군주제)로부터 특정 주제의 집필에 관한 제재를 받기도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극히 조심스러운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아주 분명하게 표현한 핵심사상은, 특정 공동체의 관직 수행에 관련하여 사용되는 이성은 사적이고 아주 협소하게 제한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누구든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그는 완전한 공동체 또는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도 공적인 것이란 흔히 국가의 공무를 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칸트의 이 주장은 여전히 매우 파격적이고 대담하게 들린다.


칸트가 국가의 공무수행을 이성의 사적사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해 버린 배경에는 그의 당대국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있다. 칸트는 그의 조국인 프러시아보다 훨씬 ‘민주적’이고‘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당대의 영국의 입헌군주제조차 지극히 자의적인 체제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심지어는 후일 그가 “지켜보는 모든 관망자의 가슴과 욕구에 열광에 가까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뜨겁게 동조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조차 그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비참’과 혁명국가가 보여준‘잔혹함’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내리고있었다. 그가 「영구평화론」 제1장에서 제시했던 여섯 가지 예비조항, 즉 비밀조약금지, 타국점유금지, 상비군 폐지, 국가 간 분쟁 관련 국채폐지, 내정폭력간섭금지, 섬멸전- 암살 등 파국적이고 비열한 전쟁수단 금지란, 여기서 금지와 폐지라는 말만 빼면, 문자 그대로 칸트가 보았던 당대 국가들,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의 속성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에도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다.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검토했던 국가들의 모습, 국가 간의 관계의 모습은 오늘날 수단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유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 칸트가 개별 국가 또는 정치 공동체란 그 자체로는 완전한 것일 수 없으며 오직 세계시민사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만 이성의 공적 사용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그렇게 단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 인용의 강조한 부분에서 분명히 한 것처럼 ‘세계시민사회’는 ‘완전한공동체(a complete commonwealth)’와 병렬·병존한다. 이러한 병렬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칸트는 국제국가, 세계공화국 또는 만민국가 발상을 거부하고 개별 공화국 간의 평화연맹 또는 만민연맹을 제안했다. 그 이유는 세계국가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국가의 형성이 개별 공동체의 자유 상실로 귀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완전한공동체’란 시민들간 의 ‘본원적 계약’에 입각한‘완전히 정당한 시민적 정치체제(a perfectly just civil constitution)’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세계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 그러한 ‘완전한공동체’는그러한 공동체간의‘평화연맹’ 또는 ‘만민연맹’으로 결속되어 이 공동체 간의 영구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시민사회란 개별시민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시민사회라는 것을 굳이 어떤 별개의 형태로 구분해보자면 그것은 완전한 시민적 정체들의 세계적 공존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완전한공동체’ 또는 ‘완전히 정당한 시민적 정치체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한시민적정치체제’의 유지를 위해 “법이 지배하는 국가 간의 외적 관계(law-governed external relationship with other states)”, 즉 만민연맹의 정착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정체와 영구평화의 세계체제는 서로를 전제한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칸트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그는 완전한 정체 또는 더 나아가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이성의 사적사용이라고 말했던 ‘국가라는 기계장치 속의 수동적 순응’이란 완전하지 않은 정체 속에서의 공직자의 한계를 지적하고있는, 우회적이지만 강력한 체제 비판의 언사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완전한 정체 속에서 시민은 이성의 공적 사용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또한 이렇듯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민은 동시에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


칸트는 그러한 이성의 공적 사용이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이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고 했다. “이성의 공적 사용 속에서 완전한 정체 또는 더 나아가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말을 잘 음미해보면 난해하고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이하고 상식적인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사익에도 국익에도 갇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생태 파괴 위의 골프장 남설에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다수는 개인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판단의 근거가 국익에 의거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의견은 확고하고 강하다. 기본권 보장을 지지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나에게 좋으니까 또는 국익에 부합하니까 라는 식의 생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심대하고 현저한 이유 없이 기본권을 제약하는 특정 체제의 이익이란 정당하지 못하다. 이번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부시의 대외정책에 반대하는 표를 던진 미국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미국의 이익이라는 차원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 속에서 미국시민이 서야 할 합당한 위치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혹은 특정 집단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를 뛰어 넘어서 이성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인권은 가장 대표적인 문제이다. 


이상 예시해본 몇 가지 단편적인 경우에서도 이성의 공적 사용은 현실 속에서, 칸트가 말한 공적 의제에 관한 ‘이성의 협소한 또는 사적 사용’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 ‘완전한 시민적 정체’와 ‘세계시민사회’는 이성이 그렇듯 공적으로 사용되는 현장에 이념적 계기로서 엄존하고 있다. 이 단편적인 경우들에서 드러나듯 그러한 판단 속에서는 ‘완전한 시민적 정체’와 ‘세계시민사회’를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세계시민사회는 도래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계시민사회 논의의 주된 흐름들은 이러한 칸트의 사고와 오히려 배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먼저 세계시민사회 개념 도입에 반대하는 (학술적)보수주의의 시각에서는 세계시민사회란 세계국가 없이는 도대체 성립은커녕 생각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국가중심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시민사회란 국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세계시민사회 개념 도입에 적극적인 시각에서는 세계시민사회를 국민국가의 국경 안에서는 도대체 성립할 수 없는 무엇으로 보기도 한다. 세계시민사회란 국경 밖에 또는 국경을 늘 오가고 가로지르는 그 움직임들 속에 존재할 뿐이다. 국가의 폐쇄된 울타리 내에 세계시민사회는 도대체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흐름은 국민국가의 정치체제, 대의체제에 강하게 회의하고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논자들 중에는 칸트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칸트가 말하는 ‘세계시민적 목적’은 개별국가 차원에서는 도저히 성취될 수 없고, 세계시민사회의 상은 오직 국경을 넘어 확장·발전해가는 속에서만 구체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칸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오히려 세계시민사회의 이념적 계기가 개별시민사회 차원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사회의 상태가 칸트가 말하는 완전한 시민적 정체, 또는 완전한 정체, 또는 세계시민사회의 상황이다. 그러한 완전한 시민적 정체 속에서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 완전히 발현된다. 공적 의제와 정책에서의 공공성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중’ 앞에서 개진되고 실현된다.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론에서 인간은 특정 정체 또는 개별 시민사회의 구성원에서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해가지 않는다. 그 둘은 병존한다. 문제는 ‘이성의 공적사용’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현재 개별국가의 시민사회는 존재하지만 세계시민사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언명은 잘못 정위되었다. 이러한 단계론적 사고는 칸트의 이성의 사적사용과 공적사용의 구분을 이해할 수 없거나, 개별국가적 공공성을 넘어선 세계시민적 공공성을―최소한 현 단계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는 늘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당신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칸트의 세계시민과 여성주의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

칸트의 세계시민과 여성주의를 결합시킬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칸트의 세계시민 개념이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기존에 통용되던 국제 질서의 패러다임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대안적 시각이라는 데에 있다. 기존의 국제 사회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은 보통 현실주의나, 자유주의적인 시각인데, 쉽게 말하자면 둘 다 철저히 국가적인 관점에서 국가가 주체가 되는 국제 사회를 상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칸트의 세계시민 개념에서 국제 사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성의 공적 사용을 하는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자유로운 정체이다. 칸트가 비록 이 세계시민의 개념에 여성들을 포함시킬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칸트의 세계 시민 개념이 오늘날의 사회의 경종을 울리는 사상이며, 이를 여성주의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는 세계화 속의 고립이 진행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동유럽 국가들 내의 극우주의 정치 지도자 등장, 독일, 프랑스에서의 극우정당의 득세 등은, 세계적으로 협력과 조화는 퇴색하고 있고, 시민들 개개인의 이성적 사유가 약화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하고, 더 평화적인 방향으로 국가들을 다시 이끌기 위해서는, 국가들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성의 공적 사용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류의 절반인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의 동참도 필요할 것이다. 여성주의는 오히려 칸트의 세계시민과 같은 흐름을 여성들에서부터 만들어내어 확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을 배제한 칸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벌은 자신의 철학으로 여성들이 승승장구 해나가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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