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름차차 Jun 30. 2019

루소의 근대적 인간에 여성은 포함되는가?

루소의 여성 배제와 여성혐오의 정당화 논리


철학자의 사상과 삶의 불일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루소의 초상화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프랑스혁명의 아버지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이 낳은 아이 5명을 모두 고아원에 버린 매정한 사람이었다.




철학자의 사상과 삶이 불일치할 때, 그의 사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루소는 1712년 제네바공화국에서 시계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루소를 출산한 후 그 후유증으로 9일 만에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홀로 키우다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 뒤 그 이후에는 외삼촌 손에서 자랐다.

동판공 도제로 지내기도 했는데 이 시절을 루소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로 묘사한다. 죄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랑부인이라는 후원자 덕분이었다.



루소는 16살에 후원자인 바랑 부인(Madame de Warens)을 만나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음악공부를 하여 음악사로 활동한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는 독학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집중하는 시기였다. 




루소의 후원자였고 훗날 연인이 된 바랑부인(Madame de Warens)



루소는 10대에 후원자인 바랑 부인을 만났지만 20대가 되자 후원자와 후원인 혹은 유사 모자 관계를 청산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출생 직후부터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은 루소에게 바랑부인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연상의 바랑부인에게 끌렸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일반적인 연애라고 보기는 어렵다.



루소는 바랑부인과의 연인관계 이후 여러 귀족 부인들과 연애하며 지냈지만 결혼은 귀족부인이 아닌 세탁부 하녀와 하였다. 오랫동안 동거해온 세탁부 하녀인 마리 테레즈 르 바쉬에르(Marie-Thérèse Levasseur)와 루소는 1745년 결혼하였다. 아내였던 마리 테레즈는 지적 능력이 매우 떨어져 백치와 같았고 지나치게 순진하였다.



루소는 <에밀>에서 자신의 아내의 순수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루소에게 있어 마리 테레즈집안일을 하는 사람이자 성적 대상에 불과하였다.  이를 고려하면 루소가 자신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기만 내지 변명을 위해 <에밀>에서 아내를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루소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고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루소의 사상과 철학을 사랑하는 학자들은 루소가 살던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아원에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까지 표현한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아내에게 아이 양육을 전담시킬 수 없고, 자녀가 많으면 저술활동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리다. 애초에 제대로 가정을 꾸리고 책임질 의지가 없었음에도 결혼을 한 루소에 대한 비판보다 그가 남긴 저작의 가치에만 집중한다.




루소의 저술활동


 루소는 1749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도덕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디종 아카데미가 모집하는 논문 공모에 도전하였다. 논문의 주제인 제목을 보자마자 루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서 한 번에 스쳐 지나가는 경험을 하며 현기증을 느꼈고 당시 통념과 달리 학문과 예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의 도덕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며 최고상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을 하며 1753년 <인간불평등기원론>, 1762년 <사회계약론><에밀>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한 저서는 아직도 유명하고 루소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루소가 연애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신엘로이즈> 속 루소의 여성관,

어머니 아내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여성


일반적이지 못한 연애와 결혼생활에서 오는 좌절 때문인지 루소는 1761년 연애소설 <신엘로이즈>를 출간하였고 이 소설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761년부터 1800년 사이에 72판본 이상 간행될 정도로 인기 있었다.




이 소설의 집필은 자신에게 진실한 사랑의 경험이 없음을 깨달은 루소가 쥘리라고 부르는 상상 속의 연인과 사랑에 빠지며 시작된다.


쥘리가정교사인 생프뢰는 쥘리를 사랑하게 된다. 쥘리는 처음에는 생프뢰를 설득하여 사랑을 거절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퇴역군인인 아버지가 딸과 생프뢰의 관계를 눈치채고 생프뢰를 쫓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인 볼마르 남작과 쥘리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생프뢰는 쥘리에게 만나주지 않는다면 자살하겠다며 다시 다가온다.

다시 만난 쥘리와 생프뢰는 결국 아이까지 가지게 되고 이에 격분한 아버지의 폭력에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이 과정에  쥘리의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죽자 쥘리는 죄책감에 빠지고 생프뢰는 파리를 떠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볼마르 남작과 결혼한 쥘리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볼마르 남작은 쥘리와 생프뢰의 과거 연애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아직도 옛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생프뢰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부른다.


그리고 일부러 두 사람만 두고 여행을 떠난다.


생프뢰는 쥘리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지만 쥘리는 어머니와 아내 자리를 지키며 이를 거절한다.

그러다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 폐렴에 걸려 죽는다.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일생동안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생프뢰임을 고백한다.


쥘리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생프뢰를 쥘리의 사촌인 클레르가 위로해었고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후 클레르, 생프뢰, 볼마르가 함께 살며 쥘리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루소는 자신을 생프뢰라고 생각하고 일생동안 자신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허구의 인물 쥘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대리 만족한다.


 루소식 정조 개념을 쥘리에게 요구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은 생프뢰ㅡ라고 쓰고 루소라 읽히는 에게 쏟아 붓기를 기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생프뢰는 가련한 주인공 쥘리가 죽은 뒤 새로운 여성인 과부와 또 다시 사랑에 빠지며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남았다. 쥘리의 캐릭터와 생프뢰의 삶을 보면 루소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 남성으로서의 본인의 욕망, 캐릭터에 투영된 루소의 자의적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쥘리에게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덕목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구조를 활용하여 연인이라는 지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쥘리이다. 생프뢰는 죽지도 않고 지위도 재산도 상실하지 않았으며 사회의 평판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새로운 사랑도 얻었다!


생프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루소에게 있어 <신엘로이즈>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소재였다. 요즘 드라마로 나온다면 여성 혐오에 기반 한 막장드라마라고 평가 받을 것이다.






<불평등기원론>을 통해  본 성차별 기원    

     

1755년 네덜란드에서 출간괸 <불편등기원론> 판본



루소가 추론한 최초의 자연상태, 즉 가족도 만들어지기 전의 초기 단계에는 자연인은 남녀 모두 독립적이고 자유로웠다.

심지어 남녀의 육체 능력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단계의 자연인은 현대인보다 유사인간(sub-human)에 가깝다.


인간은 진화과정을 통해 신체적으로 약했던 초기와 달리 남성과 여성 모두 대등한 수준의 ‘사나움과 강건함(ferociousness and vigor)’을 획득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여성도 남성의 강압적인 힘을 물리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유연히 만나고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각자에게 성적인 욕망이 없다면 성적 결합으로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 해소는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영향을 미쳤는데 여성은 임신과 출산, 육아를 맡게 되지만 남성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생존이 가능해져 독립하면 어머니였던 여성 역시 다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자연 상태에서는 임신의 횟수도 적고 생존이 용이하며,
아이가 빨리 자라 독립하기 때문에 집과 가족이 없는 상태에
양성은 모두 독립된 개체로 비슷한 삶의 방식을 누린다.



하지만 성적 욕망이 다른 성으로 향하게 만들며 이러한 욕망의 달성은 양성의 협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섹슈얼리티는 타인을 갈망하고 사귀고자 만드는 본성이다. 이렇듯 섹슈얼리티는 자의식(self-awareness)과 사회성(sociality)의 원천이다.


남녀의 결합이 ‘일시적 사회’를 이루고 모자의 사회는 일시적 사회 보다는 조금 더 긴 ‘임시의 사회’를 만든다. 이러한 시각은 남녀의 육체적 차이를 강조하는 기존의 주장과는 다른 혁명적인 시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대해 많은 현대 여성주의자들이 동의하고 동경을 보낸다.



 하지만 루소는 이 단계에 있는 동물적 인간에게는 사랑이나,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움이 없기 때문에 지향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루소의 시각에 대해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도덕적 인간으로 진화한 뒤 불공평한 성차별 구조를 양산하는 문제에는 왜 침묵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성불평등을 용인하고 묵인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 인간으로 진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일까?



원시 자연상태에서의 성평등 시기의 모두가 독립적인 초기 자연 상태에서 가족이 만들어지는 황금시대(golden age)로 이행하면서 변화를 겪는다. 가족생활이 시작되면서 여성은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고 남성은 가족 보호와 생계를 맡으면서 성의 성격은 분화한다. 이 과정을 루소는 인류 진화와 함께 나타난 성의 성격(nature of sex) 진화과정으로 본다. 여성은 남성에 의존적으로 변화하고 남성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욱 독립적이 된다.



루소의 추론대로 인간이 진화했다면
성차별과 성 능력의 차이의 기원은 가족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황금시대의 진화는 인간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으로 진행된다.

집의 발명이 이에 영향을 미쳤는데 남녀가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육체적 성에 대한 욕구는 도덕적 감정인 사랑으로 진화한다. 같이 사는 습관을 가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감정인 부부애(conjugal love)와 부성애(paternal love)가 생성된다.



집의 발명이 가족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분화, 분업 과정을 야기하였다.

이 과정에 여성들은 집안에서 덜 활동하게 되면서 과거 남자와 비슷하게 가지고 있던 ‘사나움과 강건함’의 특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루소는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해 남자는 욕망(desire)에 의해 여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여자는 그 욕망과 필요(desire and needs)에 의해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생존의 필요 부분에서 더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의존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주의자 수잔 오킨(Susan Moller Okin)은 루소가 남성성을 독립성으로 여성성은 의존성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남성은 무한한 가능성의 측면에서 범주화한데 비해 여성은 재생산(출산)의 역할에 한정하여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남성 본성인 독립성은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초기 자연상태에서 찾고, 의존적인 여성의 특성은 후기 자연상태인 황금시대에서 찾는 등 비일관적이고 모순적이라고 비판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근대의 정치학자 모두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양쪽이 말하는 자연이란 다른 개념이다. 근대에 발견된 자연이란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진 자연이다. 순수하게 가상적이 것이며 동시에 적절한 최초의 원상(status quo)이다. 반면 가부장제는 아버지의 권한을 자연적 권위에서 찾는다. 마치 왕에게 통치의 권한이 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왕권신수설을 떠오르게 하는 논리구조이다. 부모 중 남성인 부모에게만 권한이 선택적으로 주어졌고 이는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에밀>, 근대적 인간에 여성은 포함되는가?


에밀은 인간의 본성과 교육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인 소피와 남성인 에밀을 등장시키는데 등장인물의 성별에 따라 다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교육을 통해 여성으로 길러내고 남성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루소가 지향하는 근대적 인간,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은 단 한 번도,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라고 느껴서는 안 되며, 천부적 교활함을 발휘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고, 남자가 쉬고 싶어 할 때면 언제든지 더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 더 달콤한 동반자 되기 위해 스스로 애굣덩어리 노예로 변해주어야 한다. 이는  자연의 섭리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여성에게 복종이라는 큰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주입시켜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 미덕의 주춧돌인 진실과 강인함의 함양에도 어느 정도는 제한을 둘 필요가 있다” - <에밀>



여성의 본질이 태생적인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진행하기 어렵다.


루소가 말하는 근대적 인간 개념은 근대적 남성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에는 여성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루소는 여성을 태생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남성에 의존적인 존재로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수많은 저작 중 <에밀>을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자평한다. 위와 같은 여성 혐오에 기반 한 저서를 자신의 대표 저서라고 칭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여성관과 가장 일치하는 저작이 <에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루소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문명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상호의존관계가 붕괴하면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경향이 심화되는데 두려움을 느껴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육’시키고자 한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경향이라 함은 정념에 휩싸인 남성을 여성이 성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사고이다. 첫째, 성욕은 남성에게만 있는 욕구가 아니다. 둘째, 성적 욕구를 이유로 과연 여성이 실제로 남성을 지배하고 있는지 입증하는 과정이 없다. 남성의 시각에서는 여성이 남성의 정념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회 전반의 권력, 자본, 지위 모두 남성 우위 지배 상황에 단순히 확인도 되지 않고 입증할 수도 없는 정념 지배의 논리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양성의 근본적인 차이를 섹슈얼리티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루소가 일생을 정념에 휩싸여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긴다.  



루소는 근대를 열고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불평등 기원을  밝히며 "평등"을 "제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루소의 사상 덕분에 근대적 인간은 드디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집단 속의 "개인"으로 발견될 수 있었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문제에 천착하였지만 실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사상과 불일치한다.


그러나 루소가 제안한 근대적 인간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고민한 근대적 인간에 여성은 애초에 배제되어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삶은 성차별적 여성관과 일치한다.

루소의 삶이 사상에 반영되어 있고 사상이 그의 삶을 변명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상, 육체적 성의 법칙상 여성은 능동적이지 못하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루소의 주장에는 독립적이고 지성을 갖춘 여성과 제대로 된 교감을 경험해 본 적 없다는 개인사가 반영되어있다. 

루소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후원해준 어머니뻘 되는 바랑부인과 연애하고 귀족부인들과만 관계를 맺어왔다. 이후에도 온전한 대화 조차 통하지 않는 세탁물 하녀와 결혼하여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버리는 등 일반적이며 책임감 있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여성을 가정 안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온전한 대화의 상대방, 관계의 상대방으로 접해 본 적 없기 때문에 능동적이지 못하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루소의 저작물에서 보이는 여성은 항상 피동적인 존재이다.

자연적으로, 신체적으로 주체적이지 못한 여성에게는 이에 맞는 교육법이 필요하고(에밀) 진화과정에서 이러한 양성의 권력구조는 불평등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으나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불평등기원론). 여성은 남성을 정념에 휩싸이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정조관념이 필요하며 이를 지키는 여성은 숭고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남는다(신엘로이즈).



근대가 “개인”을 발견한 시기라면
우리 시대에는 성(性)에서도 “개인”을 발견해내야 한다.


개인은 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사회 속 개인은 자신이 놓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회가 성별로 요구하는 특성은 다르며 이에 따라 사회화 과정이 진행된다.  여성성, 남성성은 만들어진 것으로 이러한 구분 자체가 강요라는 점을 깨닫는 것에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출발해야 한다.




시대에 갇힌 철학자들 매거진에 연재한 책이 2020년 4월, 

<평등은 미래진행형: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철학>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847398


전자책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selectedLargeCategory=001&barcode=4801190149311&orderClick=LAG&Kc=




매거진의 이전글 중이의 기나긴 망명과 여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