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써먹을 데는 없지만 쓸모는 있는 시인

게임 <컬트 오브 더 램Cult of the Lamb>

by 난란

최근 닌텐도 E샵에서 <컬트 오브 더 램> 번들 할인을 하길래 구입했다. 대충 사이비 교주가 되어서 교단을 확장시키는 게임이라고 들은 터라 가볍게 시작했는데, 플레이어 캐릭터인 '어린 양'이 다른 사이비 교단(옛 신앙)에 의해 목숨을 잃으나 '기다리는 자'라는 신적 존재에 의해 부활하고, 그를 위해 교주가 되어 세를 불리는… 생각보다 무거운 내용이었다.


'기다리는 자'를 봉인한 네 명의 '옛 신앙'의 주교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역(던전)에서 그들의 신도들과 괴물들을 물리치고, 아이템을 모으고, 모은 아이템으로 침낭을 짓고 건물을 만들어 신도들을 재우고, 신도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 음식을 하기 위해 농사를 짓고, 심지어 신도들이 싼 똥까지 치워 줘야 한다.


신도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모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옛 신앙의 주교들의 구역에서 붙잡힌 이를 구출하거나, 두 번째는 옛 신앙의 주교들의 부하를 쓰러뜨리고 전향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구역인 다크우드에서 신도를 꾸준히 포섭한 후 열심히 교세를 불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상황이 포착됐다.


모두가 열심히 빌고 일하는 와중에


혼자 떨어져 있는 아가레스. 너 뭐 하니?


다들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혼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는 아가레스는 다크우드에서 전향시킨 신도로, 본래 눈을 여럿 가진 중간 보스였다. 이름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신도들과 달리 고정된 이름과 더불어 '증인'이라는 이명도 갖고 있었다.




중간 보스에 멋진 이름도 갖고 있던 터라 전향시키면서 거는 기대가 컸는데 일은 안 하고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모습에 실망했지만 원래 경영이라는 것이 뜻대로 안 되는 법. 모른다면 가르쳐 주면 된다는 생각에 친히 다가가 직접 일하라고 명령하려고 했는데


?


선물도 줄 수 있고 뇌물도 줄 수 있는데 일을 시킬 수가 없다. 다른 신도들에게는 나무를 자르든 돌을 캐든 건물을 짓든 근면성실히 일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데 밥도 먹고 똥도 싸는 주제에 일은 안 한다. 버그인가 싶어 이것저것 눌러보던 차 발견하고 말았다.



게임 개발자는 대체 시인을 워라고 생각한 걸까?


증인 아가레스의 특성은 '시인'으로, 일을 하지 않고 시를 쓴다. 일을 시키지 못한 것은 버그가 아니라, 아가레스가 시인이기 때문이었다. 이 게임의 개발자는 대체 시인을 뭐라고 생각한 걸까? 일단 밥벌이에는 못 써먹겠다고 생각한 건 확실한 것 같다. 말을 걸면 아가레스는 무릎을 꿇고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아가레스는 말을 걸면 시를 들어달라고 하면서 여러 시를 들려 주었다. 교주인 어린 양에 대한 시, 믿음에 대한 시, 교단에 대한 시, 신도들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시… "멋지지 않나요?", "저는 영감 받았습니다!", "아직 모자란 것 같아요" 등 여러 감상을 제시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시를 내놓았다. 늙어 죽을 떄까지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


시인이란 어떤 직업일까? 많은 직업의 끝에 '가家'가 붙는 것과 달리 시인은 '인人'이 붙는다는 점에서부터 다른 직업과는 제법 다르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적어도 현재는 '돈 안 되는 직업'이라는 것만은 명확한 듯하다. 오스카 와일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문학의 최고 경지인 시예술은 시인에게 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가장 소득 낮은 직업은 숲 해설사, 문화 관광해설사였다. 이 기사를 본 직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시인이 1위가 아닐 리 없는데?' 였다. 요약된 기사 말고 자료를 제대로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평균소득 하위 직업 50개를 정리한 표를 발견했다.


역시. 평균값으로 따지자면 자연 및 문화 해설사가 시인보다 낮지만 정규분포로 볼 땐 시인이 훨씬 낮았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확인하고 난 이후에 밀려드는 이 미묘한 기분은 뭘까. 이긴 것 같은데 진 것도 같고…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백석도 가난한 자신에 이야기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모두 "가난한 나"에 대한 이야기인 점도 두드러진다. 시인들은 왜 이렇게 가난한 시인 이야기를 좋아할까? 아무래도 본인도 가난해서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는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가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가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가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현실 질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을 백석의 시는 풀어내고 있다. 이 가난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또한 그것이 과연 선천적인 것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힘도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가난'이 '고통'인 세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시인은 누구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컬트 오브 더 램에서 '증인'인 아가레스가 '시인'인 이유도 그러하지 않을까. 아이템을 줍고 건물을 올리고 번제를 지내고 사냥을 하면서 관성적으로 게임을 '밀다' 아가레스에게 말을 걸면 아가레스는 이 교단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게임' 안의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 질서에 너무 깊이 몰두하다 보면 현실 질서와 가치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아가레스는 한 발짝 떨어져 일하지 않되 가끔 경배와 기도를 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게임 내 세상에 대해 '보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시인'인 '증인' 아가레스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가 참다운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본래적인 존재의 자리에 가 닿으려고 하는 자들 중 하나로 시인을 꼽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 집단의 본래적인 자리를 찾아 주는 결단을 하는 자로서의 시인 말이다. <더 컬트 오브 더 램>의 아가레스는 '도래할 자'로서 공동체의 방향과 형상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한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횔덜린은 마지막 신의 도래를 갈구함으로써 우리에게 잃어버린 민족의 고향을 일깨운다. 그는 우리에게 국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진리에로의 가까움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귀향을 요구한다. 그는 신이 사라져 버린 가난한 시대에 이 땅에 존재의 진리를 구현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도래할 자들 중에서도 가장 참다운 의미에서의 도래할 자가 된다.

이선일,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6, 131쪽.


이 게임의 개발자는 시인을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써먹을 데는 없지만 분명 쓸모는 있는 존재라고. 땀 한 방울 안 흘린 아가레스는 늙어 수명을 다했는데, 왜 그렇게 '쓸모 없는' 아가레스가 그리운지 모를 일이다. 특정 스킬을 찍으면 죽은 신도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데, 그를 죽음에서 다시 불러와야겠다.




고 생각하고, 열심히 레벨업해서 아가레스를 다시 부활시켰다.



앞으로도 영원히 시 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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