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뺏기 게임의 승자는 누구인가

희정, <일할 자격>

by 난란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책표지는 옛날 타자 게임 <베네치아>를 모티프로 구성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단어(빗방울)가 수면에 닿기 전에 재빨리 입력해 없애는 고전 게임이다. '바람직한', 즉 '정상적인' 노동자의 자질인 (성실한), (강인한), (열정적인) 등은 파란 글씨로 존재하며, 그렇지 못한 노동자의 자질인 (나태한), (얕보이는), (골골대는), (나이 든) 등은 플레이어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사라졌나'? 잘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여섯 파트로 나뉘어 있다. 1) 비생산적이거나, 2) 여성이 혼자 양육을 맡거나, 3) 질환을 앓고 있거나, 4) 돌봄 노동을 하는 고령자이거나, 5) 과체중이거나, 6) '현역'이 아닌 사회복무요원(공익)들은 노동자임에도 '제대로 된' 노동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이들이 하는 일이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상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싹싹하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주지 못하거나 '잠깐 하고 말 일'인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1), '정상 가족'의 뒷받침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양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거나 (2), 건강함을 갖추어 생산성을 최대화할 수 없거나, 생산성을 지닌다 해도 '유별나' 보이거나 (3), '그 나이 먹고 노후 준비도 못 해 놓은' 사람이거나 (4), 절제력이 부족하고 굼떠 보이거나 (5)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 (6) 이다. 이들은 모두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푸코는 정상norm과 규범(율)norm의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18세기 이후 등장한 규율 권력이란 활동하는 신체에 미치는 미세한 권력이자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생산성을 확보한다.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나남, 1994, 215쪽.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이 순종-효용성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규율'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규율의 역사적 시기는 신체의 능력 신장이나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하는 때이다. 인간의 신체는 그 신체를 파헤치고 분석하며 재구성하는 권력 장치 속으로 편입된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권력의 역학'이기도 한 '정치 해부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해부학'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원하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뿐 아니라, 기술적 방법으로 결정된 속도와 효용성에 의거하여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의 신체를 장악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다. 규율은 이렇게 복종하고 규율화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든다.

심재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읽기』, 세창미디어, 2021, 51-53쪽.


즉 '규범(율)'을 내재화한 순종하는 신체는 '정상'으로 변모된다. 푸코는 의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의 논의를 빌어와 '규범'과 '정상'이 같은 궤에 존재한다는 점을 지작한다. 규율이 효용성을 위하여 순종하는 신체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18세기 동안 정상(규범)화의 일반적 과정, 아동, 군대, 생산 등에 관한 정상(규범)화 효과의 증식'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상(norm, 규범)은 전혀 자연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적용되는 영역과 관계하여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요구와 강제의 역할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생각을 캉길렘의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정상(규범)은 "결과력으로 권력의 의도의 담지자"이다.

심재원, 앞의 책, 138-139쪽.


그러므로 '규범', 즉 '순종하는' 신체의 규격 범위에 들지 못한 이들은 '비정상'으로 취급되며, '노동'은 '노동'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일이라고 다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아야 하며, 입에 무엇인가를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일이겠으나, 일 중에서도 '더 평등한' 일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효빈도 스스로가 생산적이라고 느낀 날들이 있었다. 카페 아르바이트, 방과후교사, 돌봄교사까지 '스리잡'을 뛰던 시기였는데, 효빈은 그때 난생처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나'에 도취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모님 눈에 효빈의 열심은 생산적이지 않았다.

희정, 『일할 자격』, 갈라파고스, 2023, 42쪽.



최근 전 아이돌의 '몰락'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떴다. 그런데 문제는, 마약 투약이나 주변에 빌린 돈으로 인해 빚이 5억이라는 상황보다는 "주방 알바"가 그의 몰락한 "신세"를 가리킨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아이돌은 떳떳한 일이고, 주방 + 아르바이트는 "신세"라는 딱지가 붙을 일인가? 한 줄만으로 두 가지 혐오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정상성'에서 벗어난 '노동'은 '혐오'가 된다. 정상성은 규범에서 비롯되며, 규범은 권력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점은, 이 '정상성' 또한 너무나 자의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140] "정상적인 것은 따라서 규범의 연장이 동시에 과시이다." 이는 "규칙을 배가하는 동시에 가리킨다." (-) 정상은 따라서 "정적이고 평화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이고 논전적인 개념이다.

정상은 "모순과 외부성 관계가 아니라, 역전과 극성의 관계"와 관계한다. 정상은 "자신에 대한 준거가 정상적으로 여기도록 금지하는 모든 것을 평가절하하며 스스로 관계의 역전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다양의 합, 차이의 해소, 분쟁의 청산의 가능한 양식으로 제안되기" 때문이다.

[141] 규범(정상)은 사실 "자신이 선호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만족스러운 일의 상태를 실망스러운 일의 상태로 대체하려는 의지의 도구로서 세워지거나 선택될 때만 준거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가능 질서의 모든 선호는 아주 흔히 함축적으로 가능 역逆질서의 혐오를 수반한다." 그 형태가 함축적이건 명시적이건, 정상은 현실을 가치에 준거시키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극적 대립에 맞추어서 질적 차별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규범화의 경험, 특수하게 인간적이거나 문화적인 경험의 이 극성이-본성은 정상화 없는 규범성의 관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정상의 그 적용 영역에의 관계에[142]서 위반의 규범적 우선성을 토대짓는다."

심재원, 앞의 책, 140-142쪽.


돌봄노동을 젠더화하고 이를 낮추어 보는 여성혐오적 코드와 신자유주의적 생산성 및 효율성을 첨병으로 삼은 '정상성'은 비장애/정규직/남성/n00만원 이상/사무직/젊은이/서울…로 구성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편협한 '정상'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만큼 이 좁은 '정상성' 안에 머리를 들이밀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정상'의 범주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을, 우습게도, 그 노동으로 인한 단물은 받아먹으면서 지워버리는 것이 타당하느냐이다.


참가자보다 적은 수의 의자 뺏기 게임보다 '정상' 뺏기 게임은 더욱더 어렵고 잔인하다. '정상'이라는 좁은 틀 밖에 있는 수많은 세계를 지우고 외면하며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은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타당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옥죄는 것과 같다. '나는 절대로 이 선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야'라고 외면하며, '자기관리'와 '갓생', '독기', '미라클모닝'으로 이를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결국 자신과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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