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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by 난란

<타임스>, <뉴욕 타임스>, <라이브러리 저널>에서 상찬한 이 책을 나는 강력히 추천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하여 도서관의 예산을 사용하고 책장에 포함시킨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3명의 예약자에 대한 미안함에서도 비롯된다.


이 책은 잘 못 쓰여졌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서론과 본론, 결론의 논리가 유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 논의 전개가 비논리적인데다 일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글의 전체 내용이 엉망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아주 시의적절하며 합당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실은 괴물이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아 하는가?"라는 질문.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탐색이 이 책의 핵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사랑하는 로만 폴란스키가 아동 성폭행범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수신자이자 독자에게 부여된 아주 곤란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첫째 문제로 돌아간다면,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제기하는 괴물 예술가와 그 결과물을 사랑(소비)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로 시작된다. 그리고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괴물들'을 호명한다. 성범죄, 폭행,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놀랍게도 본론에 해당하는 이 '괴물성'에 대한 논의는 타당하다. 작가는 초반에 '감정'을 다루며 이를 '당사자성'과 연결짓고, '역사'로 귀결짓는다.

남자들은 우디 앨런이 왜 그렇게까지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든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맨해튼>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났다고 하면 남자들은 말한다. “그 감정 말고요. 그건 틀린 감정이에요.” 그는 권위를 갖고 이야기한다. (-)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를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나는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물의 이력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역사의 승리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 승자는 남성이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58쪽.


이 '역사'는 작가주의와 연결된다. 작품을 읽을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작품 그 자체? 독자에게 전달되는 의미? 작가가 포함된 세계? 작가 그 자체? 정답은 '모두 다'이다. 작가주의란 그 중 작가에 무게를 두는 관점이지만, 작품 그 자체만을 독립된 개체로 보고 작품의 구조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신비평적 관점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어떤 도덕적, 미학적 이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문학 비평가들이 유럽에서 동떨어져 드넓은 미국 땅에 흩어져 있다 보니 중요한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56)이라는 논의, 보다 근본적으로 아무리 탈역사적으로 읽으려 해도 언어 자체가 역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물론 작품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작품'만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역인 독자 또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관점을 본론에서 죽 제시한다. 권위적 비평과 객관적 반응이 신화라는 것, 느낌, 감정, 주관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반응이란 불가능하다(97)고 말한다. 이것은 굳이 이론을 끌고 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라는 개념이, 이 글에서 일관성 없이 남용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 랜들 케넌이 2019년 미시시피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나는 항상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겪은 순간과 상황, 그 이전에 우리를 스쳐 간 순간과 상황에 복무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하고 싶다. 과연 어떤 반응, 어떤 의견, 어떤 비평이 역사와 완전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와 이력의 힘에 종속되어 있고 그 역사가 형성한 조건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역사를 초월한 주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101쪽.


괴물 남성들의 작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때 나는 공정한 관찰자로서 이 질문에 다가가지 못한다. 나는 역사가 제거된 사람이 아니다. (-) 너무나 많은 여성 혹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나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개인적 이슈가 있다. 따라서 내가 괴물 남자들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질문할 때 나는 그들의 희생자들에게 연민만을 갖지 못한다. 나 또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입장인 적이 있었다. (-) 이 문제에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그 고소인들에게 공감한다.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 꼭 그래야 할까? (-)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 온 아픈 일들과 , 위대한 예술이 주는 자유와 미학적 장엄함과 기이함을 못내 경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긴장이 도사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감정적 질문이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102쪽.


독자인 나 또한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넘어서 당사자성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가해자가 만든 작품을 소비하고 싶다.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일까? 나도 궁금하다. 그런데 문제는, 작가는 여기서 멈춘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감정을 가진다. 감정은 아주 비합리적이다. 혼란 그 자체이다.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가해자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며,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


이 글은 바로 이 순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까? 감정이란 과연 '비'이성적인가? 어떠한 감정도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앞에서 인용해 놓고서는 이 '비합리적인' 감정, 괴물의 작품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저 '보잘것없는 인간의 천성'으로 치부하고 끝내 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애초에 작가가 인용한 린들 캐넌의 말처럼 감정, 그보다 더 이전 단계인 감각조차 역사적이다.


감각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인상을 남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개된다. 우리가 느낌을 해석한다는 점에서도, 애초에 그러한 느낌이 어떻게 느껴지는지가 해석을 둘러싼 과거 역사와 관련 있다는 점에서 매개된 것이다. (다양한 느낌을) 인식하는 과정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라 아흐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67-68쪽.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앞선 부분에서도 논리가 삐그덕거리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두 번째 문제가 점점 확해진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 괴물 예술가의 작품을 여전히 애호하는 사랑의 감정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 즉 괴물 예술가들의 작품과 결별하자는 태도에 반박하기 시작한다.


미학적 경험은 우리의 향수나 기억과 떼러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 경험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우리가 겪은 생생한 현실은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을 확장하고 조영한다.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다. (-) 시인 하니프 압두라킵은 우리의 개인적인 기억과 그 기억을 정의한 예술가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팬의 정치적 책임은 기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향수를 느끼고 욕망에 도전하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향수에 찐득하게 붙어 있는 사운드트랙에 도전하는 것이다.” 압두라킴은 망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혹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만 고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기억을 이제 마음에서 내려놓자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압두라킬의 말대로 정치적 책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작품에 대한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무언가가 우리를 감동시켰다면 우리가 누구이건간에 우리는 그 무언가에 아주 작은 충성심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103-104쪽.


우리 모두가 안다. 작품은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데에 크나큰 도움을 줄 수도 있으며, 잊히지 않는 과거의 한 부분일 수도 있으며, 충분히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가 아닌가? 그 작품을 디딤돌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면, 그리고 그만큼 성장했다면 그만큼 성장한 나 자신은 더 넓어진 시야로 과거의 것을 놓아 주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아니, 예를 들어 숭고한 사랑을 노래한 사람이 실은 거짓된 모습을 보였더라면? 오히려 우리는 사기당한 순간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왜 독자나 수신자는 일방적으로 예술가에게 충성하면서 제발 그들이 우리의 향수를 더럽히지 않기만을 빌어야 하는가?


한편 작가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만일 자신이 바그너와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면 분명 바그너에게 그건 아주 머저리 같은 생각이므로 집어치우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인간은 점점 나아지며 과거는 야만이었고, 현재의 우리는 가장 나은 버전일 것이라는 생각 또한 자유주의의 신화라고 말이다.


인간의 지속적인 발전을 믿는다.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은 선의 목적론으로 인간은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결국 우리는 더 좋아지고 나아지리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를 역사로부터 분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의 힘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저기 저 멀리, 혹은 우리 뒤에 아니면 우리 밑에 있다. 우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역사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우리는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내가 그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바그너에게 지금 당신 개소리하고 있다고] 편지를 쓴 사람, 목소리를 낸 사람, 유대인을 몰래 숨겨 준 사람,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정거장을 제공한 사람이 나였을 거라고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은 말 그대로 불에 타 재가 되고 군인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어린이들은 미국 국경의 캠프에 억류되어 있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165쪽.


이 이야기는 다시 앞의 역사와 연결된다. 그렇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야만의 시대'라며 과거를 자신과 분리하려는 자유주의적 환상에 젖어 있을 수 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가면 독립운동 했을 거라고 큰소리 땅땅 치면서, 막상 현재 산재한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나서지 않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언급했듯 #미투 운동이라는 것, '예전에는 그게 잘못이 아니었다'라는 가해자들의 면피용 대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작품에 대한) 사랑을 못 잃겠다고 이야기하느냐는 것인가.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면피용 대사를 사용해 가면서. 그래서 이 책의 논리는 뒤죽박죽이다. 그렇게나 강조하는 '감정'은 피해자 편에 섰다가 가해자 편에 선다. 이 혼란은 글 전체에서 지속되면서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작가는 이제 완전히 가해자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깨어남 속에서 “우리는 이 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책임을 갖는 방식이 그 작품과 창작자를 소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돈과 관심을 끊는 것이 진보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그러나 그게 정말 변화를 가져오는가?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292쪽.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그러면 뭘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가져오는 것이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문제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언제나 윤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련의 결정이 내려진 다음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이 올바르고 윤리적인 행동인지 스스로 해석해야만 한다. (-) 음악 산업은 음악 종사자와 관련된 윤리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 일은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늦추기 위해 해야 할 일의 규모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관이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재활용하고 물병을 재사용하고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등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집단적 힘이 없는 우리 원자화된 개인은 매우 용맹스러워 보이는 우리 소비, 우리 행동, 우리 결정이 실은 궁극적으로 의미 없다는 감각만을 갖게 된다.

피셔는 책에서 고립된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 소비의 비도덕성을 받아들이라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293-294쪽.


자본주의는 우리 삶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윤리적 행동에 대한 해석의 몫은 소비자에게 전가되었다. 왜냐? 음악 산업은 윤리보다 이윤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렇기에 더욱 윤리적 행동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마크 피셔의 논의를 가져오면서 결론을 내린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소비하려고 해 봤자 결국 후기 자본주의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라고.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근거 사용이다. 마크 피셔가 지적한 부분은 자연 보호라는 문제를 효율성 낮은 재활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며 개인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자본주의적 태도에 대한 지적이다.


첫째, 환경 보호와 괴물 창작자가 동일한 층위의 문제인가? 아니다. 전지구적 조별 과제이자 복잡다단한 산업 환경과 연결된 환경 보호와 창작자가 동일한가? 누구든 팬 백 명만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팬 백 명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뜻이다.


죽은 예술가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산 예술가의 밥줄은 끊을 수 있다. 죽은 예술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묻힌 다른 예술가들을 발굴할 수도 있다. 조금 더 가 보자면, 재활용이라는 것이 실제로 효용성이 낮더라도 환경에 대한 관심과 일상적 행동의 확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 쓸모가 없다고 덮어버린다.


불쌍한 마크 피셔. 무덤 아래에서도 울고 있겠지.


예술은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경험은 이를테면 드라이버 하나를 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우리는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 때도 소비자의 역할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소비자란 근본적으로 타락한 역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괴물성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인가? 나는 물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 괴물이다. 나는 괴물이다.

우리가 괴물 남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미투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사건이 터지면 비평가들은 곧바로 “그래서 그 X의 작품은 다 버릴 겁니까?”라고 물으면서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 문제의 초점을 가해자와 가해자를 지지하는 시스템에서 개인 소비자로 옮긴다.

유명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는 일은 결국 얼룩이 없는 긍정적인 유명인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한다. 나쁜 유명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좋은 유명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주입한다. 유명인이란 도덕성의 주체가 아니고 재현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294-295쪽.


대체 여기서 왜 이 이야기가 나오는가? 어차피 이 자본주의 하에서 나도 괴물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저 괴물 창작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의미 없다는 말인가? 괴물 창작자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을 완전무결한 창작자를 원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위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명인이란 재현 가능한 이미지. 맞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를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은 왜 의미가 없냐는 것이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적어도 저 '재현 가능한 이미지'가 되려는 연예인 지망생들은 학교 폭력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연예인들은 재난 상황이 터졌을 때 거금을 기부한다. 왜 그러한가? 그게 좋은 이미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물이라면, 그래도 좀 착한 괴물이 되어 보자고 하는 것이 대체 왜 의미 없는 짓으로 치부되는가.


장르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남양의 초코에몽도 예술 작품처럼 누군가의 과거에는 소중한 추억이자 잊지 못할 향수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 비도덕적 행위로 인한 남양유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꾸준한 불매가 60년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것 또한 의미가 없는가? 어차피 자본주의 하에 있으므로?



이런 논리는 기껏해야 냉소주의다. 정치라고 한다면 이 당이든 저 당이든 어차피 대의민주주의 안에서 민의를 대신할 ‘진짜’ 정치인 따위는 없으니 다 포기하자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렇다고 작가는 그렇게 비판하는 ‘자본주의 밖’을 향하자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대안도 없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나 좋은 대로 하고 싶고, 그것에 대한 비난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은 글러먹었으니까. 내가 뭘 하든 바뀌겠는가?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정답은 없다. 당신이 그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다. 책임감이란 케케묵은 생각이며 비극적으로 제한된 소비자의 역할을 강화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없고 권위자가 있어서도 안 된다. 이제 당신은 곤경에서 벗어났다.(?) 당신은 일관적이지 않다. 당신은 마이클 잭슨을 어떻게 들어야 할 지에 대해 거창하고 통일된 이론 같은 걸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은 계속해서 위선자로 살 것이다. 당신은 <애니 홀>을 사랑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한 점도 보지 못할 수도 없다. 당신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없다. 사실 소비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 뿐이다.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당신을 나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296-297쪽.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작가가 이야기하는 '감정'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맨해튼>에 대해 느끼는 불쾌감은 정당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폴린스키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끌릴 수밖에 없는 무엇?


글쓴이는 이중잣대를 휘두르고 있다. 한편으로 이 세상은 후기자본주의에 접어들어 모든 것이 소비되는 글러먹은 세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다른 것을 소비하는 것과 달리 윤리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에 금칠을 하고 싶다면 그것을 자본주의에서 끄집어내라. 자본주의의 힘을 인정하려거든 소비의 영향력을 인정해라.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자기합리화는 그만둬라.


그리고 제발, 감정이라는 것이 이성의 반대편에 있다는 논리는 집어치워라. 본인도 위에서 감정이란 역사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오로지 '감정'에만 좌우된다면 그것은 병이다.


스티븐 프라이는 바그너를 사랑하고, 나에게 데이비드 보위를 들어도 되냐고 묻는 대학생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사랑하고, 나는 폴란스키를 사랑한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310쪽.


우리는 괴물 남자들의 예술에 대해 말하면서 실은 더 큰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문제다. (-) 끔찍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당신이 [벽돌로 자식의 머리를 내려친]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고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이 질문이 우리 가족, 우리 배우자,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가? 우리가 던지는 쓰레기, 나쁜 행동, 실망, 발작, 배신도 견디는 사랑의 끈질긴 속성이 문제이자 해답이다.

우리 인생에서 끔찍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로 우리는 그들을 계속 사랑한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314쪽.


그리고 그 다음 부분에서 작가는 벽돌로 엄마에게 맞은 이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사랑'을 정당화한다. 아니, 그 정도라면 병원에 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건강한 사랑은 아니다.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버릴 수 없는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병증이나 증상이라고 한다. 동시에 이러한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또한 병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책은 결국 이렇게 끝난다. 감정이란 비이성적이며, 그렇기에 괴물 창작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판단을 옆으로 유보하는 결정에 달려 있다. 사랑은 무정부 상태다. 혼돈이다. 우리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차가운 기후와는 완전히 다른 기후 시스템인 감정적 논리에서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한다.

펄 클리지는 더 나이 들고 더 온화해진 후에 마일스를 향한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에 대해 하는 말에는 다정함, 슬픔, 그리고 감정이 담겨 있다. “제발 다음에는 그의 인품과 성격이 그의 음악만큼 사랑스러워져서 우리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그저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315쪽.


작가가 그렇게 강조하는 후기자본주의라 한다면 소비자의 힘과 의중이 공급자를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공급자는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왕관을 쓰고 아득히 높은 계단 위에 군림하는 ‘천재’이자 ‘신’으로, 그 천재성을 발휘한 작품을 비천한 ‘독자’, ‘수신자’에게 신탁처럼 내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이 벼락이나 홍수를 내리치지 않도록 “그저 희망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누가 “불완전한 인간”인가?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말이다. 이 글이야말로 괴물 사육자, 아니 괴물의 신자가 괴물에게 바치는 송가이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인 점은, 괴물 창작자에 대한 불매나 비난이 쓸모가 없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효용성이 없는가? 하비 와인스타인은 감옥에 보내졌다. 작가가 그토록 사랑하는 폴란스키는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가? 폴란스키에 대한 폭로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괴물 창작자에 대한 불매가 의미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것이 실제로 효용성이 없다는 근거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거나 아니면 근본 문제인 후기자본주의의 바깥에 대한 논의를 구축해 달라. 본론에서는 괴물성에 대한 여러 논의를 '이성적으로' 제시하면서 결국에는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의 '감정'을 만능열쇠로 찔러대지 말고 말이다.


작가의 '감정'은 이해한다. 사랑이란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고 계산기 두드리듯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 혼자 즐기면 된다. 도덕적 수치심은 느낄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본인 스스로도 당당히 내보일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 혼란까지 집어뜯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괴물을 거부하는 것이 쓸모 없는 짓이라고 깔아뭉개고 있지 않은가.


'좋아했던 걸 부끄럽게 만드는 놈은 죽어야 해'라며 고통받는 독자, 기실 자신에게 "나는 정말 여러 괴물성에 대한 논의를 보았어. 넌 이 문제에 깊이 생각했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훌륭해. 그런데 결국 내가 느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자, 가서 계속 소비하자. 불매하자는 멍청이들은 쓸모도 없는 짓을 하고 있어." 라고 속삭이지 말라. 자기합리화를 넘어 338쪽짜리 면죄부를 팔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타임즈>나 <뉴욕 타임즈>가 박수를 칠 것이다. 작가가 그렇게나 반복했던 후기자본주의로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니 말이다.


한편 이 글의 작가인 클레어 데더러의 논의보다 더 '효용적인' 논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콘스턴스 그레이디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가 괴물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에서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활용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한다. 그레이디는 <가위손>의 조니 뎁과 그가 엠버 허드에게 휘두른 폭력 사이에서 갈등한다. 해당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면 아래 글을 읽는 것을 더 추천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가는 작품을 평가할 때 작가의 전기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은 딱히 유용하지 않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포식자가 만든 예술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의견이 달랐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논거가 있습니다. 스위프트와 헤이즈-브레이디가 제시한 주장 중 하나는 예술 작품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예술가의 도덕성을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다른 주장은 우리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모든 예술 작품에 동등한 비판적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비평가들이 작품을 약간은 선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 예술가가 괴물인가?"가 아니라, "이 예술 작품이 독자로서 나에게 그 예술가의 괴물성에 공모해 달라는 것인가?"입니다.

예술가들이 그들의 예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든, 당신은 항상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예술과 예술가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복잡한 철학적 이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 왔지만, 대부분의 살아있는 예술가들을 그들의 작품과 연결 짓는 매우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한 가지가 있습니다: 돈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의 작품 소비로 인해 이익을 얻지 않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포식자나 포식자의 예술 작품에 관여하지 않기로 선택할 것입니다.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은 사람이 만든 좋아하는 예술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예술에 접근하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을 제공할 특정 문학 이론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한 학자들 중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당신에게 말을 거는 예술 작품은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에게 말을 거는 예술 작품입니다."라고 헤이즈-브레이디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텍스트를 사랑했다가 나중에 사랑을 풀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똑같이 그녀는 "사랑하는 작가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사랑하는 예술을 위해 이러한 아이디어를 통해 제가 어떻게 생각을 정리했는지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과 이론화 작업 끝에 저는 어느 정도 제가 시작한 점에 다다랐습니다: <가위손>을 향한 제 십 대 시절의 사랑도, 조니 뎁에 대한 혐오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에게는 앰버 허드의 멍든 얼굴 사진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거의 30년 전의 [조니 뎁의] 좋은 연기에 대한 감정적 반응보다 더 강합니다. 이것은 제 입장에서는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인 판단입니다.

Constance Grady, <What do we do when the art we love was created by a mo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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