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다락방에서 찾은 나의 기억

윤경희, <분더카머>

by 난란


분더카머Wunderkammer. 낯설지도 않을 정도로 생소한 단어다. 분더카머란 무엇인가?


분더카머는 근대 초기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들이 자신의 저택에 온갖 진귀한 물건을 수집하여 진열한 실내 공간을 지칭한다. 호기심을 북돋는 경이로운 사물들의 방이라 풀어 말할 수 있다. 기예의 산물을 집적한 공간이라는 뜻에서 쿤스트카머Kunstkammer라 하기도 한다. (…) 분더카머는 고정된 가상이 아니라 언제든 촉지하고 새로 배치할 수 있는 사물 그 자체를 수집, 보관, 진열한다는 점에서 스투디올로와 결정적 차이가 있다.

윤경희, <분더카머>, 12-13쪽.


1280px-Museum_Wormiani_Historia_1655_Wellcome_L0000128.jpg 올레 보름의 분더카머


분더카머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신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그것들과 다르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일반적으로 소장 및 전시 대상의 종류가 특화되었고, 그것들을 분류하고 진열하는 방법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기준 범위 안에서 체계화되어 있다. (…) 반면 분더카머는 개별 소유주의 독특한 취향과 정신 세계를 반영하고 극화한다. 분더카머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당대인의 계급적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긴 했지만, 외부 세계에 편재한 각종 감각적 대상들을 향한 인간의 애호심과 백과사전적 앎의 의지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윤경희, <분더카머>, 15-18쪽.


6a0c906d3efdf6360a173f3e3dec8148-1-1024x766.jpg?type=w966 페란테 임페란토의 분더카머


분더카머는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온갖 물건을 모아 놓은 방이다. 어떤 물건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방의 주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아끼는지에 대한 생각이 온전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더카머는 물건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안에서 자신다움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슈필라움Spielraum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글쓴이의 분더카머이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주요한 기억과 요소로 개념어나 문장을 빚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물건에서 개념으로, 개념에서 기억으로 이어지는 글을 읽다 보면 글쓴이의 분더카머에서 내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소에는 잊고 있던 낡고 쾨쾨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나는 보물찾기에 대한 글쓴이의 글에서 나를 찾았다.


어릴 적 학교에서 떠난 소풍에서 글쓴이는 보물찾기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틀렸다. 글쓴이는 '보물찾기'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보물 이름이 적힌 색종이를 찾는 놀이를 알지 못한 글쓴이는 친구들이 무언가를 찾는 모습을 보고 쓰레기를 줍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심히 쓰레기를 모은 후,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 자신이 모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과 친구들의 웃음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서 수거한 색색으로 접힌 종이쪽지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보물찾기라고 했잖아. 이렇게 보물 이름이 적힌 색종이를 찾았어야지.

보물을 찾지 못한 아이,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한 아이는 아마도 나 하나뿐. 나아가, 보물찾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 아이는 확실히 나 하나뿐. 세상에는 보물찾기라는 놀이와 말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왜 다른 아이들은 내가 버려진 것들을 주우러 다닌 곳에서 시선과 발길을 돌리지 않았는지. 그들이 보물섬을 탐험하는 동안 나는 홀로 황무지를 방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는 동안 나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절대적 바깥에서 홀로 감독 없는 노역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윤경희, <분더카머>, 46-47


친구들이 보물찾기라는 놀이를 알고, 단어를 알고, 즐거운 규칙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쓰레기를 줍는 착한 아이'라는 역할에 심취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부끄러움.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 글쓴이는 "형언하기 어려운 수치심과 염오감"을 느꼈다고 서술한다. 그렇게 깊숙이 남은 강렬한 두 손 안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글로 떠오른다.


내 두 손바닥 위, 온갖 놀림받은 작은 물체들의 클로즈업. 에메랄드빛 칠성사이다 유리병 조각, 은화처럼 동그랗고 깔죽한 병뚜껑, 은박 껌종이, 셀로판 사탕껍질, 구슬, 폭죽 껍데기, 돌돌 말린 색색 콘페티… 가장 수치스러운 습득물은 글자 없이 텅 비고 구겨진 색종이 쪼가리들. 쟤네들은 이걸 왜 버릴까, 다른 아이들이 발견했다 내팬개친 것을 거둔, 나중에 배운 무서운 이름은 꽝. 다채롭게 빛나는 것들. 내보이면 부끄러운 것들. 이름은 쓰레기. 차마 헤어질 수 없는 그것들을 여전히 손 우물에 담고, 어찌할 줄 모르는 혼란과 비애감으로 외따로 서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 엄마가. 그리고 다정하게 말한다.

괜찮아. 엄마한테 줘.

윤경희, <분더카머>, 48쪽.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글쓴이에게 엄마는 다가온다. 혼내지도 꾸중하지도 그렇다고 요란스럽게 달래지도 않은 채. 부끄러운 흔적들을 엄마에게 넘기라고 부드럽게 권한다. 그리고 그 말은 생생하게 반짝이는 부끄러운 기억보다 더 오래오래 남는다.


어떤 말들은 영원히 고동치는 심장처럼. 괜찮아. 살아오면서 이 말이 품은 온기로 나를 다시 덥힌 순간들이 많았다. 이 말을 되새길 때의 눈가의 물방우로 다시 기운을 낸 순간들이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 손의 심장을 너에게 건네준다.

윤경희, <분더카머>, 48쪽.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누군가의 위로보다 부재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맞벌이 하는 부모님과 서먹서먹한 언니는 집에 없었고 한 살 어린 동생과 할머니가 함께 집에 있었다. 시간은 저녁인가 밤인가. 어쨌든 해가 없었다. 나는 2절지 색도화지를 거실 바닥에 놓고 엎어져서 방학 숙제인 가족신문을 만든다. 동생은 옆에서 바라본다.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풀로 붙이고,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반은 꾸며내 쓴다. 있는지 없는지 가물가물한 가훈을 떠올려 적고 뜻을 열심히 적는다. 가족 인터뷰도 적는다. 물론 내 상상으로. 조개껍질도 붙인다. 친척들이 다 함께 모여 바닷가 횟집에 갔을 때 주워 온 것이다. 가족끼리 바다에 갔을 때 주워 온 것처럼 붙인다. 작은 머리통을 쥐어짜 가족신문을 만든다. 우리 가족이 정말 이런가? 이런 말을 했나? 모르겠다. 도화지가 너무 크다. 하지만 방학 숙제는 해야만 한다. 다 만들고 나니 한밤중이다.


그 때 내가 혼자 만든 가족신문은 상을 받았다.


혼자 만든 가상의 가족 신문. 상을 받은 가족 신문. 아직도 생생한 차가운 거실 바닥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색도화지. 교실 뒤편에 붙은 가족신문 아닌 가족신문을 떠올리면 가슴이 한 쪽이 꽉 메인다. 아마 나의 분더카머에는 그 가족신문이 걸려 있지 않을까. 글쓴이의 섬세한 감정선을 마중물 삼아 읽다 보면, 어느새 나의 분더카머 또한 또렷하게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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