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는 조지 손더스의 19세기 러시아 단편소설 강의록이다. 아무래도 이 수업이 시러큐스 대학의 문예창작 과정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번역한 것 같다. 저자도 말하듯, 이 수업을 통해서 '대가'의 비법을 훔쳐서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결국 '좋은 독자는 어떻게 읽는가'와도 연결된다.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야 하고, 잘 읽기 위해서는 또 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책-읽기란 다른 매체에 비해 지루하다. 반짝이지도 감미롭지도 않은 까만 글씨로 뻣뻣하고 충직하게 기다리기만 하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책의 그 특성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하며, 이를 통해 사유 역량을 강화한다.
타 매체와 비교했을 때 텍스트는 나의 인생과 지식, 경험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동원하는 방식의 사유라는 점이죠. 이런 차이는 생각보다 커요. (…) 책을 읽을 때는 나의 참여와 관여가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돼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졸리고요, 자게 돼요. 하지만 잘 만든 영상은 보고 있으면 그냥 보게 돼요.
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127쪽.
그러므로 문제는 익숙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단어들에다가 이름이 여섯 글자가 넘어가는데다가 별다른 설명 없이 A를 A라고 부르지 않고 B, C라고 부르는 러시아 단편소설을 어떻게 '잘' 읽을 수 있느냐는 것일 테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러시아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당장 20세기 초반 한국소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 내가 쓰는 단어나 속한 세계가 아니면 충분히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조지 손더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각각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고 손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이렇게 읽을 수 있구나', 혹은 '아, 이런 걸 의도했구나'라는 부분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읽기 방식을 다른 텍스트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이는 문학에 대한 손더스의 깊은 믿음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이는 결론이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과정에서 일어난 독자의 마음 속 변화에 있다.
체호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정확이 정리한다는 것은 '우리가 문제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완전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100쪽.
손더스는 텍스트를 읽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내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들Things I Couldn't Help Nothing, TICHN'이라는 딱지가 붙은 수레이다. 이 수레 안에는 표면적 플롯이나 언어적 측면, 구조적 특징, 관점 변화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읽는 도중에는 의식적으로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이후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다시 한 번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손더스는 수레 안에 있는 것들 중 이야기의 '비규범적' 측면들, 즉 과잉 재현을 통해 관심을 끄는 측면들에 주목한다. '대체 왜 이렇게 쓴 거지?'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부분들, 비현실적인 사건이나 두드러지는 일상적인/고상한 언어들, 과도하게 길다고 느껴지는 묘사들을 감내한 후, 그것이 작가의 계획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과잉의 패턴을 작품의 장점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그 순간 지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손더스는 우리가 어떻게 책을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마리야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하인은 주인의 고집에 왜 저항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가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노래 대결이 핵심임에도 전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마을과 인물에 대한 설명인 까닭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소 뜬금없는 두 소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습관은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한 측면으로 이해한 이야기를 다른 측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가 어떤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지, 삶과 글쓰기에 이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도 발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주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이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더스는 그것을 '도덕적 변화의 사소함'에서 발견한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제시하고 있다. 도덕적 변화, 그러나 그 변화는 죄인을 완전히 개조하거나 그가 갖고 있던 에너지를 어떤 순수한 새 에너지로 바꿈으로써 일어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에너지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변화 모델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우리가 지니고 태어나고 지금까지 늘 우리를 돕던(그리고 가두던) 것 외에 달리 우리가 무엇[383]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당신이 세계적인 수준의 걱정꾼이라고 해보자. 만일 그 걱정 에너지가 극도의 개인위생으로 향하면 당신은 '신경증 환자'가 된다. 그것이 기후 변화를 향하면 당신은 '강렬한 비전을 가진 활동가'가 된다.
지금보다 나은 일을 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의 관점을 조정하고, 타고난 에너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힘을 사용하지 않겠지다고 맹세하거나 우리라는 사람 또는 우리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을 참회할 필요가 없다. 그 에너지가 우리가 모는 말이다. 그냥 그 말을 말하자면 올바른 썰매에 묶기만 하면 된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382-383쪽.
하인을 살린 주인은 도덕적이다. 비록 그가 이전에는 아주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권력지향적이고, 돈밖에 모르는 잘난척쟁이였다더라도 말이다. 그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고귀하다. 그리고 그 고귀함은 선천적인 선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앞선 욕심의 방향을 약간 바꾸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는 여전히 잘난척쟁이다. 그럼에도 그는 하인을 살리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라는 금언을 읽고 난 후의 깨달음과는 다르다. 텍스트는 여러 요소를 바탕으로 메시지를 (반쯤) 숨기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저 꼿꼿하고 재미없고 충직한 활자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변적인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저는 여전히 대하소설과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걸 읽고 향유할 힘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처지와 입장에 역지사지하고 감정이입하는 것이 입체적으로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인간의 삶이 어떤 국면에서 얼마나 입체적일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끊임없이 장면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리터러시 교육이 삶에 대한 이해를 지향해야 한다고 할 때, (-) 삶이라는 게 얼마나 [183] 복합적이고 입체적인가에 대한 이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국면이 바뀔 때마다 그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황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때 그 사람이 그러는 이유에 대한 이해, 거기에 도달하게 해주는 게 리터러시여야 하는 거죠.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182-183쪽.
물론 여기서 다루는 텍스트가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으며 화룡점정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손더스는 그 부분도 활용한다. 모자라다고? 어디가? 왜 모자랄까?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할 필요가 있다.
한번은 수업에서 결함이 있지만 꽤 괜찮은 고골의 단편 <넵스키대로>를 가르치는데, 한 여학생이 이 작품이 성차별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나로서는 드문 교사의 지혜를 활용하여 "어디가?"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는 정확이 어디인지 보여주었다. 인물이 모욕을 당하는 두 장면을 예로 제시한 것이다. 남자가 모욕을 당하면 고골은 그 인물의 머릿속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의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가 모욕을 당하면 삼인칭 서술자가 끼어들어 그녀를 이용해 농담을 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고골이 두 장면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여자에게 내적 독백을 허락했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약간의 침묵에 뒤이어 집단적인 한숨과 미소가 나타났으며, 우리 모두 동시에 그랬다면 더 나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음을 알았다. 똑같이 어둡고 이상하지만 더 재미있고 더 정직한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 그 이야기는 성차별적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표현하는 또다른 방법은 기술적 결함이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결함은 교정이 가능했다(또는 고골이 죽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것이[389]다. 학생이 찾아낸 성차별은 분명히 거기에 있었으며, 그것은 텍스트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불공정한 서사'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 어딘가에 일반적 명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도덕적 결함처럼 보이는 것(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증, 트렌스젠더 혐오증, 현학, 도용, 다른 작가의 작품 본뜨기 등으로 보이는 것)이 담긴 모든 이야기는 분석적으로 살피면 기술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며, 그 결함을 처리하면 (늘) 나은 이야기가 된다.
이제 우리가 빙빙 돌려 이야기해 온 비난('톨스토이는 계급적 편견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은 중립적이고 쓸모 있는 기술적인 발언으로 바뀔 수 있다("정확히 어디가?"라고 물음으로써). "(적어도) 두 군데, 니키타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장면과 두 주인공이 각각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톨스토이는 비슷한 순간에 바실리에게 주었던 내면성을 니키타에게는 주지 않고 있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388-389쪽.
손더스는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이야기는 분석적으로는 기술적인 결함이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독자 그리고 작가 모두가 생각해볼 지점이다. 우리는 흔히 작품성과 도덕성을 구별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결함은 곧 기술적 결함으로 연결된다. 글은 결국 인간이 쓰는 것이고, 인간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나, 그 삶이 왜곡된 렌즈로 포착된다면 결국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라는 도덕적 결함의 예시로 다루어지는 김훈의 <언니의 폐경>이 그러하다.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인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은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이후 sns에 그 내용이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단박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폐경 중이던 "언니"가 갑자기 하혈을 하는 상황을 그렸는데, 그 난처한 상황을 "뜨거워, 몸 속에서 밀려나와"라는 굉장히 '극적인' 발언으로 구성한다든가, 손톱깎이에 달린 작은 칼 속옷을 잘라 버리고(?) 뒷좌석으로 던지는 상황이라든가, 속옷이 없는데 대관절 생리대는 어떻게 착용했는지 모를, 작가의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해서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핍진성 때문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언니의 폐경>은 여성혐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 글이 기술적으로 결함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며 주요한 제재인 '폐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을 넘어 그것을 왜곡하며, 그로 인해 글 전체의 개연성이 무너지는 결함을 지닌 글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재미를 위해서도 소설을 읽지만, 그것이 결국 삶을 담고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다른 시각으로 살아보고,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다른 자리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소설에서 찾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활자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선사하는 자들, 글을 쓰는 자들을 사랑한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결함 있는 글을 쓰는 자들을 증오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그들처럼 되고 싶어하기도 한다. 읽는 자에서 쓰는 자로의 자리바꿈. 그것은 글의 힘을 절감하는 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욕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손더스가 제안하듯이, <주인과 하인>의 '불만족스러운' 마지막 부분을 새로이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의미를 밝히고 수레 속에 넣어둔 요소들을 규명하고, 어떤 부분이 좋고 나쁜지까지도 읽어냈으니 말이다.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 손더스는 그 진리를 실천하기 위한 읽기 방법을 우리에게 친절히 알려 준다. 마지막으로 손더스가 이야기하는 소설의 의의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더 정직해지자. 우리 읽고 쓰는 사람은 읽고 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읽고 쓰면 더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읽고 쓰며,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제로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크며, 나 자신을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마이너스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그래도 나는 자주 나도 모르게 소설의 유익한 효과에 대한 근거를 [600] 대려고 하며, 기본적으로 내가 그동안 해온 작업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니 완벽하게 정직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진단하듯이 물어보자. 소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자, 그것이 이 러시아 소설들을 읽은 우리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쭉 물었던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읽기 전 상태를 읽은 후 상태와 비교했다. 바로 그게 소설이 하는 일이다. 소설은 마음의 상태에 점진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거다. 알다시피, 정말 그렇게 한다. 그 변화는 한정적이지만 진짜다.
그리고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599-6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