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이빨, <나의 먹이>
<먹는 존재>, <홍녀>, <족하>의 작가 들개이빨의 음식 에세이가 나왔다. <먹는 존재>의 진솔하고 시니컬하면서도 뜨뜻한 이야기를 좋아했던 독자로서 지나칠 수 없었다. 문장도 여타 작품과 마찬가지로 술술 읽혀 다 읽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는데, 제목부터가 작가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먹이라니, 먹이란 무엇인가? "동물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어야 할 거리. 또는 사육하는 가축에게 주는 먹을거리"이다. 사람에게 가는 것은 음식이요, 동물에게 가는 것은 먹이이기 마련인데, 사람인 '나'의 '먹이'라니?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꿔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꿔보'는 무엇인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준말이다.
오랫동안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상대적 박탈감으로 몸과 마음을 축내지 않고 지갑을 지키는 최적의 생존 전략으로 그만한 게 없다.
욕구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
모두가 나를 돌아보고 흠칫 놀라는 그날을 기다리며.
관건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동안 죽지 않고 버티는 것.
그러려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해야 합니다.
들개이빨, <나의 먹이>, 18쪽.
그렇다. 멋진 이들과 달리 길고 오래 살아남아야 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먹이'일 수밖에 없다. '나의 먹이'란 씁쓸한 자기비하를 거름 삼아 태어난 제목인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굳이 잘 먹여줘야 하나? 뭘 잘했다고? 나처럼 밥값 못 하는 저품질 인간에게 생산 과정에서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식량 자원인 육류를 먹이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콩과 채소만이 통과할 수 있는, 촘촘한 창살로 둘러싸인 자기 비하의 감옥에 갇힌 것이었습니다.
들개이빨, <나의 먹이>, 56쪽.
헌데,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나? 저만치 멀어진 줄로만 알았던 자학의 족쇄가 또다시 저를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는 피에 젖은 먹이입니다.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만든 것입니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뭘 맛있는 걸 먹느냐며 스스로를 다그쳤던 제가 시답잖은 이유로 고기를 먹겠다고요? 풀만 데쳐 먹을 때나 지금이나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는데 왜? 감히? 무슨 명분으로? 그런 귀한 자원은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같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떼부자 분들이나 잡숴야 하지 않을까요? 지구상 가장 승리한 종인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승리자가 되어야 전리품인 고기를 당당하게 섭취할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죠. 뭔 쓰레기 같은 노예근성이야. 양질의 영양분은 누구에게나 고르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쓰레기 근성에서 마냥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오래된 격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기지 않은 자 고기 먹지 말라'라고 믿는 편입니다. 저는 패배자인 저에게 고기를 허락하기 싫었습니다.
들개이빨, <나의 먹이>, 162-163쪽.
화가 나거나 막막하거나 불안하면 도지는 자기비하와 함께 입맛을 잃는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마음 속으로 보이지 않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가 뭐라고 배불리 먹나? 먹을 자격이 있나? 그러니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먹자는(살아가자는) 마음이 들 수밖에.
하지만 이렇게 자기비하와 불안으로 얼룩진 '꿔보'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다. 질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먼저 이 책에서 다루는 값이 싸고, 피해를 덜 주는 '먹이'는 채소, 콩, 계란, 우유, 견과류, 아보카도, 고구마, 밥과 김치, 빵, 고기, 술이다. (고기와 술이 나오긴 하지만, '꿔보'의 '먹이'라기에는 거리가 있다.) '(내가 뭐라고) 피해를 주지 말자'는 '나'의 고민은 인간적, 사회적, 경제적, 생물적 차원에서 이리저리 뒤섞이며 벌어진다. 인간중심주의에 푹 젖은 자본주의 안에서 보기 드문 고뇌의 현장이 책 내내 펼쳐진다.
누군가는 '이 사람 왜 이렇게 우울하고 소극적이고 자기비하가 심해?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해 봐.'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뇌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꿔보의 먹이'는 작가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열등감에 찌든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꿔보'의 삶은 자기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보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은가?
꿔보의 道
1. 남에게 신경 끈다.
2. 나 자신에게도 신경 끈다.
3. 열심히 일하되 힘들면 때려치운다.
4.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쓴다.
5. 가공의 맛을 멀리한다.
들개이빨, <나의 먹이>, 23쪽.
일레인 스캐리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이 주변 인물이나 보조자가 되었다고 느낄 때 오히려 평등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때 대개는 중심인물로 처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간/자기중심주의가 무한한 발전과 생산을 불러왔고, 환경 문제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류의 멸망이 초읽기를 하고 있는 이 순간, 오히려 우리는 '꿔보'의 도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이기를 그치고 민담에서 “측면 인물”이나 “증여자 인물”이라고 불리는 것이 된 것만 같다. 이는 전반적 평등 상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강등을 겪었다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평등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대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중심인물로 처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단지 인접해있다고, 혹은 측면적이라고(심지어 종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아마 우리는 평등 상태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133쪽.
그러니 '꿔보'의 삶도 한 번쯤 실천해봄직한 태도이다. 가늘고 길게, 오래 가는 게 좋지 않겠나. 너도, 나도, 그리고 지구도. 우리 모두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