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알리스 슈바르처, <보부아르의 말>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로 대표되는 <제 2의 성>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독일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알리스 슈바르처의 대담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1972년부터 1982년까지 십 년간 이어진 대담은 중간중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고 깊이 있는 울림을 준다.
페미니즘에 뿌리 깊은 구호를 선사한 <제 2의 성>의 작가였음에도 보부아르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웠다.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는 계급 문제가 해소됨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시간을 지나, 소련에서의 한계를 목도하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점이 오히려 그의 생각에 대한 신뢰를 더해 주었다.
저는 소련 여성들의 상황을 가까이서 보았어요. 거의 모든 소련 여성들이 일하고 있고, 일하지 않는 여성들(몇몇 고위 관료나 요직에 있는 남성들의 아내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무시당합니다. 소련 여성들은 일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해요. 그녀들은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책임을 맡고 있고,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감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권력을 쥔 중앙위원회나 의회에 있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훨씬 적어요. 그녀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덜 쾌적하고 덜 인정받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죠. 의료가 무상이기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은 극히 힘들고 고되며 국가에서 받는 보수 또한 아주 적어요.
여성들의 활동은 의료·교육 분야로 한정되어 있고, 과학·기술직 등 더 중요한 직업은 여성들에게 훨씬 덜 개방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여성들은 직업상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아요.
[28] 가령 솔제니친의 『암 병동』을 읽어보면 대단히 놀라워요. 그 책에서 우리는 병원의 거물급 인사이자 의학계의 거목인 한 여성을 볼 수 있죠. 그녀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하루를 마친 뒤 서둘러 집으로 가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해요. 상점에서 몇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것도 그녀예요. 그녀는 몹시 고된 직업상의 모든 임무 위에 집안일을 포개 올리지요. 정확히 다른 나라들에서 그런 것처럼요. 어쩌면 프랑스보다 더 심할지도 몰라요. 프랑스에서는 유사한 상황에 처한 여성이라면 가사 도우미를 둘 거예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국가 안의 여성 조건보다 낫긴 하지만 더 힘든 조건이에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소련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평등이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부아르의 말>, 27-28쪽.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요구했던 사회주의 국가에 있어, 프롤레타리아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태도는 노동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국가에 속한 여성들 또한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다만, 여전히, 성차별의 틀 안에서 가중되는 형태로 작동한다는 것이 문제일 뿐.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 자본주의 국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살기 팍팍하니 마땅히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다 육아가 더해지는 경우 일을 그만두어야 하므로 여성의 경우 집안일과 병행할 수 있는 직업으로 교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평교사 여성 비율은 압도적이지만 교장은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지 않은가? 그나마 다른 점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의료가 무상이기 때문에 의료 계열이 여성에게 열려 있다는 점일 테다.
모든 노동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하며 모든 것을 무릅쓰고 혁명을 성공시켰던 사회주의 국가는, 그렇다면 왜 그 고생을 했던가? 왜 혁명 이후에도 변화는 것이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실제(이든 결과적으로든 본래 추구하던) 사회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국가들이 실제로는 사회주의가 아니에요.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인간을 변화시킬 사회주의가 실현되지 않았어요. 생산관계는 바꾸었으나, 생산관계를 바꾸는 것이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간을 변[29]화시키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점점 더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른 경제체제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죠. 이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스스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내면화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어요. 나는 그걸 우월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남자들은 그 생각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여자에게서 열등한 인간을 보려고 하죠.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데 하도 익숙해져 있어서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여자들이 드문 겁니다.
<보부아르의 말>, 28-29쪽.
결국 성별 사이의 계급의식이 철폐되지 않고서는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보부아르가 말한 '우월 콤플렉스'는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그렇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생각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탄생하는 것이 혐오이며, 이는 누스바움이 <혐오와 수치심>에서 다룬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170]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이다. (-) 궁극적으로 모든 혐오의 기반은 '우리 자신'이다.
[205] 혐오는 취약성과 수치심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인간의 유한성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숨겨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완전히 초월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 혐오는 인간의 유년기에 경험하는 무기력함과 이러한 무기력함이 안겨주는 수치심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 원초적 수치심과 이에 대한 공격적 반응은 대부분 인간 역사에서 깊고 오래된 특징이다. (-) 당시 사회[1차 대전 이후]와 가족을 통해 독일 남성의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 일종의 병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수치심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는 점을 보여 준다. (-) 그러한 수치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170, 205쪽.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오랜 세월은 남성우월주의를 구성하였으며, 이는 보부아르의 말대로 '우월 콤플렉스'를 만들었다. 이러한 우월 콤플렉스는 자신보다 '낮은' 대상을 전제해야만 가능해진다. 노예가 있어야 주인이 존재하듯 말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우월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깃들어 있다. 즉 특정 대상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은 다르다는 우월 콤플렉스를 통해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21세기에, 특히 최근에 들어 백래시뿐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적개심과 반동이 기이할 정도로 거대해지는 모습을 보면 세계 1차대전 이후 쑥대밭이 된 독일에서 여성혐오가 득세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기반이 불안해질수록 타자-여기에서는-여성을 밀어내야만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라는 무기가 있으니 이는 더욱 수월할 것이다. 보부아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남성 실업이 있는 한 절대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을 거"(46)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실업 위기에 처한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여성들을 배제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여자는 약하니까, 여자는 감정적이니까, 여자는 뒷얘기를 하니까, 여자는 어차피 결혼하면 나갈 거니까, 여자는 살림도 해야 해서 회사일에 집중하지 못하니까… 이유야 얼마든지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까? 너보다 차별당하는 대상이 있으니 네가 당하는 차별은 차별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회사든 국가든 전체의 이익과 평등에 힘쓰기보다는 '아랫것'들에게 '떠넘기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성을 차별해서, 그래서, 정말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 나아졌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서 여성해방에 치를 떠는가? 어찌할 수 없는 불안을 쏟아붓고 분풀이를 할 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불안은 어디에서 왔는가?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묻고 싶다.
1970, 80년대에 보부아르가 한 말이 현재에도 먹힌다는 사실은 입맛을 쓰게 한다. 그럼에도 한두 세대 먼저, 더 억압적인 세태 하에서 꿋꿋이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한 보부아르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도 희망을 준다. 보부아르는 모성 신화와 더불어 기반이 되는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계약 연애를 평생토록 이행하며 이를 증명했다. 많은 여성들이 보부아르에게 환호한 것 또한 이러한 삶에 있었다. 보부아르는 여성을 여성으로 만드는 강력한 무기인 '집'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한 바 있다. 보부아르는 가사 노동에 임금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에도 반대했다. 그것은 결국 여성을 다시 '집 안'으로 들여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가사노동에 임금 부여]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가사 노동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안 그러면 그 가치는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여성의 유폐와 연결된 채 남아 있게 될 거예요. 남자들이 가사 노동을 분담하도록 해야 하고 공명정대하게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는 공동체에, 집단에 그 일을 통합시켜야 해요. 어떤 원시 부족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거기서 가정은 감금과 동의어가 아니에요. 가정의 격리[87] 상태를 깨부숴야 합니다.
<보부아르의 말>, 86-87쪽.
그렇다면 모성은 어떠한가? 모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집 자체가 문제가 아니듯, 모성 또한 그것을 강제하고 틀에 끼워맞추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고, 거부되어야 한다.
저는 모성을 거부하지 않아요! 단지 오늘날 모성이 여성에게 괴이한 함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여성에게 어머니가 되지 말라고 조언할 겁니다. 단죄해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어머니가 되라고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와 여성들이 그 안에서 어머니가 되어야만 하는 조건들이에요.
거기에 어머니-아이 관계의 가공할 속임수가 추가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가정과 아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그들이 커다란 고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즉 그들에게는 친구도, 사랑도, 애정도,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혼잡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갖기 위해 아이들을 낳는 거예요. 끔찍한 일이죠. 아이 입장에서도요. 아이를 그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어쨌든 아이는 자라는 즉시 떠나버립니다. 아이는 결코 고독에 대한 보장이 되지 못해요.
<보부아르의 말>, 87쪽.
인터뷰어인 슈바르처가 말하듯 남자와 여자가 정서적으로도 다르고 걸음걸이가 다른 것 또한 교육와 일상생활에서 비롯된다. 보부아르는 '남성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그로테스크함"(90)이나 우월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것과 정반대의 요소들, '여성적인' 특성은 비록 그것이 억압에 의해서 발현되었다 하더라도 가져가야 하는 것이며, 남성들 또한 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월감이나 나르시시즘보다는 인내와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들은 우리가 흔히 '교육받은 문명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경쟁자들을 짓밟는 그런 방식,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그런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아요. 또한 지나치면 결함이 돼버리지만 어느 지점까지는 장점인 인내심, 그 또한 여성의 특징입니다. 아이러니와 구체적인 것에 대한 감각도요. 그 이유는 여성들이 일상생활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여성적' 자질들은 우리가 받는 억압에서 기원하지만 해방된 뒤에도 보존되어야만 할 거예요. 그리고 남성들 역시 그 자질들을 획득해야만 할 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향으로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대지, 달과 조수의 리듬 같은 [91] 것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 여자가 더 영적이고 천성적으로 덜 파괴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 아니요, 그 모든 것에 어떤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천성이 아니라 삶의 조건에 따른 것입니다.
'아주 여성적인'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많은 연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제가 생각하는 모든 것과 완전히 모순되는 가장 퇴행적인 생물학주의일 겁니다.
여성이 자기 몸을 아는 것, 저는 그게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가치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여성의 몸[92]이 세계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준다고 믿어서도 안 돼요. 그건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일이며 그 자체를 '페니스에 대한 대항'으로 만드는 일이 될 거예요. 그런 믿음을 공유하는 여성들은 비합리적인 것, 비의적인 것, 우주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여성들을 더 잘 억압하고, 지식과 권력에서 여성들을 더 잘 배제하게 될 남자들의 술수에 걸려드는 거예요.
영원한 여성은 허구에 지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한 인간의 발전에서 본성은 아주 작은 역할만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여자가 남자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보부아르의 말>, 90-92쪽.
이 부분에 이르러 에코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근대 이후 발생한 환경 파괴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생태주의에 '여성적' 속성을 더한 에코페미니즘은 근대에 이르러 정형화된 이분법, 즉 자연/기술, 여성/남성, 낮음/높음 등의 이분법에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남성/기술로 인하여 여성/자연이 파괴되었으므로 남성/기술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여성/자연 중심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이를 여성의 '고유 속성'이라고 치부한다면 다시 한번 이 이분법에 갇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틀에?
그건[여성적 본질로 회귀하는 것] 여성들은 예속 상태로 되돌리는 거예요! 모성은 언제나 여성들을 예속 상태로 환원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이에요. 어머니인 모든 여성이 자동적으로 노예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모성이 예속 상태가 아닌 삶의 조건들이 존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 사정은 전체적으로 똑같아요. 여성의 주요 임무가 아이를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는 한, 여성은 정치나 기술에 관여하지 않을 거고 남자들과 주도권을 다투지도 않을 거예요. 모성의 절대 숭배, '영원한 여성'을 되살리는 것은 여성을 옛날 수준으로 퇴보시키려 애쓰는 거예요.
[136] [세계 경제 위기의 시기에 아주 편리하다는 말에] 맞아요. 여자들에게 냄비를 닦는 일이 신성한 임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아이를 기르는 것이 신성한 임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냄비 닦기와 무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여자가 집에 남아 있도록 강요하기 때문이죠. 이는 여자를 상대적인 존재, 열등한 위치로 퇴보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보부아르의 말>, 135-136쪽.
보부아르는 자신의 생에서만큼은 여자라는 이유로 크게 예속당한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21살에 최연소로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남성들 사이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끊임없이 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그럴까? 여성의 몸을 지님으로써, 여성으로 인식됨으로써,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보부아르는 이 공포를 이해하지 못(안)하는 평생의 동반자 사르트르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보부아르) 이론적으로 이념적으로 여성해방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당신조차도 여성들이 자기의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유하진 않아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요. (-) 로마 거리에서 산책할 때 항상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을 남성인 당신은 몰라요. 제가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71]어요. "당신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와 별 상관이 없어요. 나는 여자들을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슈바르처) 그건요, 꽤 반동적인 답변이에요. '사회계급의 존재는 문제될 것 없어. 나, 사르트르는 노동자에게 결코 해를 끼친 적이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절대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
(슈바르처) 장 폴 사르트르, 여성문제에 대해서 이론적 차원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므로 당신은 체제와 남성이 동시에 가한 특수한 억압의 존재를 인정하[74]고 있습니다. 제가 틀린 게 아니라면 당신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은 일반적으로 피억압자들에 대한 동의로 이끌어요.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은 절대 한 노동자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또는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를 감히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어째서 여성과 관련해서는 같은 태도가 아닌 거죠?
<보부아르의 말>, 70-71, 74쪽.
1949년 <제 2의 성>을 출간한 후, 보부아르는 1965년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천명한다. 보부아르가 살아 있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페미니즘 안팎으로 서로 다른 논의는 팽팽하게 맞서며 변화하고 있다. 보부아르의 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찬사를 받기도 하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보부아르를 찾는가? 그는 '거리를 걸을 때의 두려움'을 아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 안에서 꿋꿋이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난 게 나의 끔찍스러운 비극이다. 잉태되던 그 순간, 나는 페니스와 음낭이 아니라 가슴과 난소의 싹을 틔울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행동과 사과와 감정의 총체적 원이 탈피할 수 없는 여성성이라는 엄격한 한계 속에 갇혀버리도록 말이다. 그렇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타닐 수 있다면 좋겠다.
실비아 플라스, <스왐스캇에서 (대학 2학년을 앞둔 여름)>
당신도 거리를 걷는 것이 두려운가? 1951년의 실비아 플라스처럼 길에서 습격당하고 구타당할 것이 두려운가? 1973년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로마 거리를 걸을 때마다 위협을 느끼는가?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그런가? 그렇다면 이 글은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직시하고 극복하고, 나누고 나아가려는 용기에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 누군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즉 자신의 실존을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서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로운 1세계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보부아르를 사르트르의 동반자로만 생각하거나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의 책을 대필해주었다는 이들을 생각하면 실소가 터진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지만 그들은 결코 동일한 세계를 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