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긴긴밤>
누군가 내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굳이 답하지 않고 이 책을 건네주겠다.
이 책의 첫 장은 '나'의 발화로 시작된다. 코뿔소 아빠와 펭귄 아빠 둘을 지닌, 조금은 독특한 펭귄인 '나'의 발화 말이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루리, <긴긴밤>, 7쪽.
먼저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은 자신을 코끼리라고 생각하며 코끼리들 틈에서 코끼리의 삶을 습득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고아원을 나갈 것인가 혹은 고아원에 남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여느 코끼리와 달리 코뿔소인 노든에게는 고아원을 나간다는 것은 코뿔소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이므로, 노든은 깊이 고민한다. 그런 노든이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은 노든을 향한 다른 코끼리들의 말이었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루리, <긴긴밤>, 16쪽.
지혜로운 코끼리들은 노든이 코뿔소이자 코끼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코뿔소/코끼리라는 단 한 가지의 정체성뿐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코뿔소-코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노든은 코끼리로서의 추억과 삶을 보존한 채로 코뿔소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초원으로 나간 노든은 '훌륭한 코뿔소'를 만나 결혼하여 딸을 낳는다.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코뿔소 가족이었으나, 밀렵꾼의 습격으로 인해 아내와 딸은 죽고 노든은 동물원으로 옮겨진다. 이후 노든은 밀렵꾼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 노든에게 새로운 친구가 되어준 것은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코뿔소 앙가부였다.
노든과 앙가부는 동물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하고,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려는 도중 노든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이 또한 잠시 보류된다. 그런데 노든이 치료받는 도중 밀렵꾼들이 몰래 들어와 앙가부를 죽이고 뿔을 잘라 가고, 밀렵을 방지하기 위해 뿔을 잘린 노든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홀로 남는다.
노든이 홀로 된 와중, 동물원에는 버려진 펭귄 알 하나가 발견된다. 검은 반점이 있어 아무도 품지 않던 알을 윔보와 치쿠, 두 수컷 펭귄이 품기로 결정한다. 아빠가 된 적이 없어 불안해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알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그러던 와중 전쟁이 벌어지고, 동물원은 쑥대밭이 되면서 동물들이 풀려난다. 황폐해진 동물원을 벗어나는 노든 곁에 치쿠가 등장한다. 입에 알이 든 양동이를 문 채로. 윔보는 알을 감싸다가 목숨을 잃었고, 이제 알을 지킬 존재는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코뿔소 노든과 치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를 향한다. 알을 위해서. 그렇게 그들의 탈출 첫 밤이 저문다.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루리, <긴긴밤>, 57쪽.
노든과 치쿠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계속 걷는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비가 오면 맞고, 해가 비치면 쬐면서 걸어간다. 그러던 와중 치쿠가 숨을 거두고, 홀로 남은 노든 곁에서 '나'가 태어난다. 노든은 치쿠가 남긴 유산인 '나'를 바다에 데려다주기 위한 여정을 계속한다.
그러던 와중, 비가 내리는 밤에 노든은 밀렵꾼들을 발견한다. '나'는 노든에게 복수하지 않고 떠나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나'와 복수 사이에서 복수를 선택한 노든은 밀렵꾼들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나'가 총에 맞는 것을 보고 복수를 포기하고 함께 도망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루리, <긴긴밤>, 104쪽.
노쇠하고 부상당한 노든이 아프기 시작하자,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다행히도 지나가던 인간들이 노든을 초원으로 옮겨 치료해준다. '나'는 낮에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해 있다가 밤이 되자 노든에게 다가가 도망치자고 말한다. 그러나 노든은 거절한다. 이 초원이 자신의 바다이며, '나'는 '나'의 바다를 찾아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무슨 수로 혼자 바다를 찾아가요? 그리고 치쿠는 나에 대해서 몰라요. 나는 여기가 좋아요. 여기에 있을래요."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그럼 나 그냥 코뿔소로 살게요. 노든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니까 내가 같이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주면 되잖아요."
"그거 참 고마운 말인데."
"내 부리를 봐요. 꼭 코뿔같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나는 코뿔소가 키웠으니까, 펭귄이 되는 것보다는 코뿔소가 되는 게 더 쉬워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나를 혼자 보내지 말아요."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루리, <긴긴밤>, 115-116쪽.
코뿔소이자 코끼리로 살아온 노든은 자신이 인정받은 방식을 그대로 '나'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나'의 내력을 아는 만큼 '나'에게 설명해준다. 그렇게 그들의 긴긴밤이 몇 번이 지나고, 노든과 아내와 딸과 앙가부와 치쿠와 코끼리와 치쿠와 윔보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뒤, '나'는 노든과 헤어져 바다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바다와 마주한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루리, <긴긴밤>, 125쪽.
코끼리들 사이에서 태어나 코끼리이자 코뿔소로 살아간 노든, 모두에게 외면받는 알을 품기로 결정한 두 수컷 펭귄 윔보와 치쿠,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다에 이르게 된 '나'. 이들은 가족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가족이라고 할 것인가? 이들은 함께 '긴긴밤'을 보냈다. '긴긴밤'은 깊은 슬픔이기도, 깊은 외로움이기도, 깊은 그리움이기도 하다.
단순히 피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어도, 종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달라도, 모종의 이유 때문에 잠들 수 없어 긴긴 밤, 그 곁에 있는 이를 우리는 가족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은가? 현재 법에서는 '가족'의 의미를 혈연 혹은 혼인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다. 함께 하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실정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고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