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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03. 2024

집중할 수 있는 힘, 삶의 주도권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도둑맞은 집중력 | 저자 요한 하리 | 출판 어크로스 | 발매 2023.04.28.


많은 화제가 된 책이다. 베스트셀러에 두드러기가 나는 신묘한 체질을 가진 탓에 정말 엔간해서는 잘 팔리는 책을 안 읽는다(혹은 입소문이 나기 전에 읽어버리든가). 이 책도 달에 한 번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빙자한 수다)하는 모임이 아니었으면 안 읽었을 것이다. 읽었으니 잊어버리기 전에 감상을 몇 줄 적기로 했다.  

    

집중력 상실의 시대라는 건 별로 놀라운 말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이 책 저책 바꿔가면서 읽는 게 일상이고, 일하다가도 문자 수신음이나 PC카톡이 울리면 슬그머니 채팅창으로 시선이 가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탓에 사실상 멀티태스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집중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것일 뿐- 이라는 설명에 잠시 아연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그 전환 때문에 버려지는 시간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까지. 그러면 우리가 하루에 쓰레기통에 구겨 던져 넣는 시간은 도대체 얼마나 길다는 것인가. 명복을 빈다,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간 나의 시간들이여. 오호 통재라, 애재라.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낯선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에비타>와 <렌트>의 사운드 트랙을 거의 다 불렀다. 함께 노래하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것과, 화면을 통해 모르는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것의 크나큰 차이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전자는 자아를 없앴고, 후자는 자아를 쿡쿡 찌르고 쑤셨다. -44쪽     


자아가 하나의 공동체 안에 녹아드는 느낌, 이거 진짜 중요한 건데. 소속감이라는 것, 그 소속감을 주는 공동체 안에서 나 하나의 개인성은 녹아 사라지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모두가 연대하고 손잡고 있다는 그 감각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사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실감한다. 그러나 저러나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 역시 공포스럽지만 현실이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달리 이 새로운 방식은 관점을 유도했다. -46쪽      


자주 접하는 매체의 성격이 매체 소비자의 성품을 조각할 수 있다, 이것도 참인 명제다. 같은 서사를 소비한다 해도 책을 주로 읽는 사람과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같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원한다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를 추천하고 싶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자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사람들은 (얼이 설명한 것처럼) “저글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 저 일을 전환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해요. 뇌가 그 사실을 가려서, 의식에서는 아주 매끄러운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순간순간 뇌를 재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고요.” -60쪽     
“기술의 목적이 뭘까? 우리는 왜 기술을 만들까? 우리가 기술을 만드는 이유는 기술이 우리 안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끌어내 확장하기 때문이야. 그게 붓의 목적이야. 첼로도 그렇고, 언어도 그래. 이 기술들은 전부 우리 안의 어떤 면을 넓혀줘. 기술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냐. 우리를 더욱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거지.” -184쪽     


나는 이토록 훌륭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조차, 이런 가르침을 전수한 아버지를 둔 사람조차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어떤 조건을 무지성적으로 내버리는 효과를 내는 기술을 (본의 아니게)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섭다. 물론 그는 뒤늦게나마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떻게든 그것을 보상해 보고자-사실상 미션 임파서블이랄까, 아무튼 발버둥 치고 있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이 대목을 읽다가 그제야 나는 내가 웹디자이너로 일했던 당시에 ‘버튼 디자인’이 그래픽 업무에 분명히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연식 나온다). 그러게, 도대체 언제부터 버튼이 없어진 거지? 


하지만, 이미 무한스크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과연 도대체 누가 prev. next. 버튼을 누르게 되어있는 웹문서를 연단 말인가? 나 같아도 안 들어가고 만다. 편리함과 큰 힘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이 몸에 배어있는 인간종은, 그가 만들어낸 무한 스크롤을 결코 내다 버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인간이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까? 알프레드 노벨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안정화시키는 연구에 몰두할 때 추후에 그 연구 결과가 불러올 엄청난 결과를 예상을 다 했어야 하나? 할 수 있었을까? 대체로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이들은 장밋빛 전망에 빠져 행복회로를 돌리기 바쁘지 않을까(라고 짐작한다). 


모든 기술 개발에 앞서 과학자가, 공학자가 어디까지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슈는 어느 분야에서건(이를테면 문학계라든가, 패션계라든가, 많지 않나) 보수파와 급진파가 대립하게 되는 공통의 문제지만, 외부의 일자무식자가 감히 말을 얹자면 적어도 어떤 신박한 아이디어를 갖고 비즈니스로, 한 기업의 핵심 사업 모델로 키우는 분들은 절대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그래서 돈이 될까, 안 될까, 이것뿐이니까. 


덕분에 인간은 이렇게나 망가져 왔다. 인간이 인간‘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줄기차게 상실해 온 덕에 그들이 발붙이고 살고 있는 세계도 덩달아 현재진행형으로 망가지고 있는 중이고. 요즘 ‘현재 상황’을 고발하는 책들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세상이 잿빛으로 보이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투쟁하는 존재이지 않나. 포기하면 편한 세상, 파란 약을 먹으면 편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음에도 끝끝내 현실을 바꿔보고자 하는 투사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적어도 디지털 디톡스 데이 하루 정도는 해 볼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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