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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0. 2024

좋아하는 마음은 솔직하게

쓰루타니 가오리,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어떤 책들은 잊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기억의 수면을 헤치고 올라오기도 한다. 어떤 우연들이, 문득 마주친 풍경이, 불현듯 떠오른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을 불러온다. 혹시 이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느냐고. 


내게도 여전히 등장인물이 살았던 주소지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의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책도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기도 했고 기다리다 못해 포기하고 잠시 놓았다가 잊어버린 책도 있다. 꽤 많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연재분량이 쌓이면 단행본이 나오는 만화책의 특성상, 한 권을 읽고 나면 다음 권을 기다리는 맛이 너무 감질나서 완간이 되지 않은 것은 가급적 손대지 않는 것이 나름의 철칙이었건만 그 則이라는 것은 원체 깨지라고 있는 것 아닌가(큼…). 그리하여 몇 해 전 손을 대었다가 아이고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 그냥 완간되면 봐야지- 했다가 읽어야 할 책들이 대거 밀려드는 통에 완전히 망각의 강을 건너버린 시리즈가 있었다. 

… 는 것도 최근 지인을 통해서 깨달았다. 완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잊어버렸는데,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앉은자리에서 모조리 읽어버렸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 저자 쓰루타니 가오리 | 출판 북폴리오 | 발매 2019.02.25.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라고 하는 만화인데, 이 작품의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70대의 할머니와 10대 여고생이 우정을 쌓는다, 라는 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설정이고 그 관계를 통해 여고생은 성장한다, 라는 것이 골격인데 그 계기가 있어야 우정이건 뭐건 관계의 단초가 생기는 법이지 않나. 

할머니와 여고생이 의기투합하는 매개물은, 매개물은…


…BL만화다. 쿨럭. 


이건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말을 얹지 않겠다. 하지만 주인공인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가 우정을 쌓는 계기가 바로 그 BL 만화라는 설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70대인 할머니가 젊은 여성들(전부는 아니지만)이 즐겨보는 장르에 편견을 가지는 쪽이 외려 당연해 보이건만, 할머니는 일단 호기심을 갖고 신문물(!)을 들여다본다. 이 작품에서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만큼 중요한 등장인물이 그 BL만화를 그린 코메다 작가와 그의 만화이기도 하다. 이 관계성을 놓고 보면 사실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BL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인다. 

로맨스를 읽는 할머니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관심을 끌지 않는다. 그게 다른 장르여도 그렇게까지 시선을 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 그것도 하드코어도 종종 등장하는 BL 장르를 할머니가 들여다본다… 내가 서점 직원이어도 쳐다볼 것 같다. 순박해 보이는 할머니가 해맑게 BL 만화를 카운터로 들고 오자 알바생이던 우라라는 이 할머니가 뭘 알고 이걸 사시나 반신반의한다. 왜 아니겠는가.

아무튼... 열린 마음의 소유자 이치노이 할머니의 정신건강에는 다행스럽게도 그나마 작중 작품은 순애에 가까운 BL이어서 진입장벽이 낮았던 게 아닐까 지레짐작을 해 본다. 


난 처음 읽었는데 뭐라고 해야 좋을까…,
응원하고 싶어진다우. -1권, 53쪽


다시 찾은 서점에서 수줍게 감상 소감을 말하는 할머니에게 우라라는 절로 관심을 기울인다. 당연하다. 우라라 역시 그 장르의 헤비독자이므로. 줄곧 그 만화를 읽은 감상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는 할머니의 말에 그때껏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던 우라라의 마음은 활짝 열려버린다. 내가 그리던 모습의 친구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57쪽), 그렇지만 뭐 어때! 라는 게 우라라의 마음 아니었을까. 

코믹마켓에 함께 가자는 우라라의 제안에 이치노이 할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역시 난 그 코메다 씨라는 분의 그림이 좋아요. 
이번에 도쿄에 오신다는 거죠? 꼭 만나뵙고 싶네. 
게다가 우라라 학생이 같이 가자고 해 줘서…
꼭 가야겠다 싶었어요. -1권, 127쪽


-어어… 딱히 이렇게 할 얘기는 안 했어. 이런저런 잡담이랄까… 
-흐음- 좋겠다…
-어…?!!
-나도 그러고 싶어.
-어…아니, 하지만 나 같은 거…
-’나 같은 거’라고 하지 마. 그런 말 들으면, 나도 상처받는다구. -2권, 81쪽


소꿉친구 츠무구(츠무치)의 여자친구 에리와 지나가듯 주고받은 대화에서, 속마음이 튀어나온 에리가 이 말을 뱉은 직후 수습하지만 에리의 말은 오래도록 우라라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며 맴돈다. 자신이 늘 인간관계에 서툴다고 고민하는 우라라는 이치노이 할머니와 마주앉아서 결코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을 내내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굴린다.


이치노이 할머니, 저 친구의 여자친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만화 속에 나오는 사랑 말고는 몰라서 그런 걸까요?
츠무치나 에리처럼 지냈더라면 좀 더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을까요? 
할머니가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2권, 92쪽


말로 하지 못한 고민 상담은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타인지의 첫걸음이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객관화하고 있는 우라라의 이 모습이 성장담에 꼭 어울리는 것이어서, 모양새는 달라질지언정 그런 고민은 살면서 내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이라 그저 누구나의 삶에 필요한 성찰의 도구여서, 딱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후루룩 페이지를 넘겼다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기에 가치가 있는 그런 작은 에피소드들이 보석처럼 남아 있는 이야기여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판매회는 뭐랄까… 사람을 끌어 모은다는 점이 굉장한 것 같아. 
여기… 몇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그린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서, 또 그걸 보고 싶어서 한 곳에 모였다는 생각만 해도 정말이지…엄청 타올라. -4권, 141쪽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열정만으로 모인 장소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이른바 서코(서울 코믹월드)인데, 만화에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한번쯤은 가 보라고 권하고 싶은 행사다. 물론 말도 많고 탈도 많긴 한데, 그럼에도 그 현장의 열기가 일깨워주는 뭔가가 있다. 


5권 16쪽을 보면, 자신이 그려 내놓은 작품집이 팔려 멍하니 여운에 젖은 우라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내 남자친구 이야기」에서 자신이 만든 가방이 팔린 순간 감격에 젖어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공 미카코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된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인데, 자신의 손끝에서 태어난 무엇인가에 누군가가 도리어 이런 것을 만들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올 때의 감동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라고 강권하고 싶다. 비록 악의적으로 상처를 주고 싶어 안달인 빌런을 한 트럭 만나고 가야 할 경우가 왕왕 발생하긴 하지만. 어쨌건, 


그건 종이 위의 이야기고
그 사람들은 현실에는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어떻게 이토록
한없이 다정한 걸 만들었을까. -5권, 89쪽


작중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계기를 만들어준 만화 속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낸 순간에 이르러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가 감격을 어쩌지 못하고 들떠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마음이 울린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를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하지 않나. 누군가가 이 마음에 공명해 주기를 바라서. 


-오늘 그 아이도 와 있어요. 뒤쪽 줄에 서 있을 텐데 이 만화 덕분에 저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그려주셔서 고맙습니다. -5권, 132쪽 


코믹마켓에서 우라라가 그렸던 작품을 이치노이 할머니의 작품으로 오인한 코메다 작가(작중 주요한 매개물이 되는 BL작품을 그린 작가)가 그 작품을 보고 힘이 났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할머니가 작가에게 한 말이다. 당신의 작품 덕분에 나는 소중한 친구를 얻었어요, 정말로 고마워요, 하는 말을 건네주는 독자를 만나는 창작자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한번 더 상상하면서 책을 덮는다.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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