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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3. 2024

쉼표처럼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오사다 히로시, 심호흡의 필요

poetic something, 시적詩的인 무엇.


우리가 어떤 대상을 두고 시적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시의 정취를 가진 것, 이라고 나온다. 정취란 또 무엇인가, 하고 찾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런 정확한 의미 찾기의 꼬리물기를 놀이처럼 좋아하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진 인간도 사람도 세상엔 있기 마련이고, 뭐 아무튼. 여하간 그래서 무엇이 시적인가- 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자면 이러하다.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는 일상의 풍경에서 읽어낸 남다른 정서를 예민한 감수성으로 다듬은 함축미의 완성형이 시라면, 시적인 것은 ‘시가 될 만한’ 가능성의 양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시성이라고 해도 될까. 시의 존재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이라고 해도 좋겠다. 시는 어디에나 있기에 시적인 것도 어디에나 있다. 미처 가공되지 못한 원석과 같이 보이지 않는 광채를 간직하고 있는 것, 혹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것. 


그러므로 시를 쓰지는 않아도 시적인 문장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시가 되지 못했어도 언젠가 시의 몸을 입고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이 가운데서 산책하듯 이리저리 걷고 있는 글이 있기도 하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책이 정확히 그런 정취를 품고 있는 산문시이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만남으로 인해 무한히 호감이 생기거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기는 것처럼 책 또한 그렇다. 


"모든 것은 독서에서 시작됩니다. 책을 읽는 것이 독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잃고 싶지 않은 말을 쌓아두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독서입니다."


온라인 서점의 책소개 첫 줄에 나와 있는 말인데, 이 한 문장으로 세간에서 하는 말처럼 완전히 낚였다. 말로 꺼낸 적은 없어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누군가가 명쾌하게 말해주었을 때의 상쾌함이라는 게 있지 않나. 오사다 히로시의 책, 「책은 시작이다」가 정확히 내게 그런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이 분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다 할 수가 있지. 도대체 어떻게. 그런 호감과 의문은 당연히도 다른 책에 손을 뻗게 만든다. 오만가지 독서 에세이를 읽어봤어도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와닿는 책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책에 대해서 쓰려던 건 아니었는데. 



심호흡의 필요 | 저자 오사다 히로시 | 출판 시와서 | 발매 2020.05.20.



그리하여 인연이 닿은 책, 「심호흡의 필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이 구성 자체가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진다. 1부는 <그때일지도 몰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때’란 아이에서 어른이 된 순간을 말한다. 화자는 아홉 편의 산문시를 통해 


너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너는 지금 어른이고, 아이가 아니다. 아이가 아니지만, 너도 처음엔 한 명의 아이였다.

(...)

너는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 게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 있었다’. 이상하네. 거기엔 틀림없이 경계선이 있었을 텐데,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그 경계선을 네가 언제 뛰어넘었는지, 너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9쪽


라고 묻고 곰곰 생각하여 답한다. 화자는 생의 지극히 사소한 순간들을 복기하며 바로 그 순간, 너는(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고 말하며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비교적 평온한 지금을 흔들어 과거를 돌이켜보도록, 그리하여 아이와 어른의 미묘하지만 뜻밖에 단호한 경계를 돌이켜보도록, 정말로 너는(우리는) 제대로 어른이 되었냐고. 


한 자리에 앉아 머릿속으로 시간을 더듬어 다시 걷던 화자는 2부를 시작하며 걷는다. 시를 읽는 독자에게 그가 보는 풍경과 애수를 고스란히 전해주고자 하는 의도일까. 


공간을 이동하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으로부터 애틋하고 소중하고, 절로 공감하게 되는 그리움을 천천히 이야기하다, 절묘하게 다시 시간으로 배경을 튼다. 책장담화 마지막 편지에서 이 책을 언급하며 모노노아와레 物の哀れ 이야기를 잠시 했었는데, 이 감수성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이 산문시집을 읽으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어디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걷는 것을 즐기기 위해 마을을 걷는다. 아주 간단하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그럴까? 어디로 뭔가를 하러 갈 수는 있어도, 걷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 걷는 것. 그게 쉽게 잘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가장 간단한 것. -77쪽
가끔 안톤 파블로비치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다. 인생이란 과연 고뇌할 가치가 있는 걸까, 라고 했던 체호프.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아니냐인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 손을 써서 일할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한 그루 자신의 나무와 함께할 것. -114쪽


시를 머금어보는 하루쯤 삶에 내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특히 이런 기막힌 날씨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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