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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08. 2024

당신이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

박혜윤,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영어 책

외국어가 필수라고 하는 시대가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 이제는 그것을 모두가 너무나 당연히 여기기 때문에. 

누가 그랬었다. 실시간 통번역이 다 해결되는 세상에서 무엇하러 힘들게 외국어를 배우냐고. 왜일까?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영어 책 | 저자 박혜윤 | 출판 동양북스 | 발매 2024.03.30.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는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있다. 외면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으나, 열심히 혹은 자연스럽게 외면해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존재다. -24쪽


이 문장을 보고 얼마나 박장대소를 했던지.


나는 영어를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이들이 곧잘 헤매는 어려운 단어도 쉽게 읽어내는 나를 선생님은 몹시 칭찬하셨고, 선생님의 칭찬이 달았던 어린애는 내가 이걸 잘하나 보다, 생각하며 더더욱 열심히 빠져들었다. 그렇게 영어와의 다디단 허니문이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갑자기 해외파견을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미국 동부에 발을 들였을 때, 건강검진 서류를 떼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 turn around, 이 한 마디를 알아듣지 못해 어버버 하다 한숨 섞인 웃음소리를 들었던 나는 순식간에 영어를 미워해버렸다. 그러나 어떻든 무슨 사연을 거쳤든 나는 그럭저럭 영어에 순응했고 적응했으며 한국에 돌아온 순간 그것을 몽땅 뇌내 무덤에 파묻는 만행을 저질렀고, 한참 뒤에 또 그 땅에 발 디디게 되었을 때 이미 사멸하지나 않았을까 싶었던 그 말들을 도로 파내어서 때 빼고 광내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아오, 지긋지긋해. 그러나 딱 1년간, 집순이 생활만 하다 와야지 생각했던 나는 뜻밖에도 아마도 평생, 죽을 때까지도 손을 놓지 못할 것 같은 절친들을 만나버렸고 사람은 늘 저 같은 동류의 인간들과 어울리는 법이어서  친구들은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요즘 뭐 읽어?를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러니까, 내게 영어는 어느덧 친구와 놀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언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쓰기는 좀처럼 잘 잊히지 않아도 말하기는 가장 빠르게 사라져 버려서, 나는 갈수록 말을 하다 말고 더듬고 에, 또, 하고 머뭇거렸고 내가 왜 그러는지를 빠르게 눈치챈 친구 하나는 야, 그냥 생각나는 단어 아무거나 막 던져! 꿰어 맞추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내가 뭐 너한테 완벽하게 교과서적인 영문장의 모범을 듣자고 전화했겠냐? 아닌 말로 나도 문법적으로 완벽한 영어를 말하는 것도 아니거든? 우리 그냥 얘기를 하자, 응? 을 쉬지도 않고 따르르르륵 내뱉었다. 그러게. 내가 여전히 영어를 놓지 않고 있는 건 너희랑 얘기하려고 그러는 건데. 하고 웃어버린 나는 또다시 아씨, 내가 진짜 옛날만큼은 못해도 그래도 다시 영어 입에 붙이고 만다를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는다. 


영어를 놓지 말아야 할 동기가 있어도 이렇게 지속하기가 힘든 것이 외국어 공부인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강력한 동기를 하나 만들고 볼 일인 것인가… 


내가 이해하기에 덕질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이 없지만 ‘이건 나의 이야기야’라는 확신을 만들어가는 과정. 미국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도서관과 서점을 누비며 농사, 목공, 바느질과 뜨개질, 요리, 식물채집, 가축 기르기, 비누와 화장품 제작 등을 다루는 온갖 종류의 실용서를 탐독했다. 시골에 이사 왔으니 이런 것들을 배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저자들이 어떤 인생의 경로를 지나서 책까지 쓸 정도로 기술을 익히게 됐는지 그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한 사람마다 다 달라서 절대로 복제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에 탐닉했다. -49쪽


다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읽는 것, 그들의 인생을 축약한 것을 듣는 것은 나도 좋아한다. 다만 하나의 기준을 갖고 압축한 것이 좋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로 시작하여 한나절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대하드라마보다도 긴 건, 이야기가 아니라 고문이랄까. 역시 감상할 만한 것이 되려면 압축의 미학과 편집의 기술이 제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들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시간을 떠올릴 때 ‘복종하는 시간들’이라고 나 혼자 중얼거려 보곤 하는 시간들.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리는 과정이다. 영어를 배우는 데에 나를 찾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냐고? 배움은 이렇게 정의 내려진다.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 영어라는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 영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르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건 ‘나’라는 사람이 그 전과 후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85쪽 


복종하는 시간들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간신히 귀가 트여 ESL을 벗어난 나는, 학년에 맞는 영어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16세기 세계의 대문호이신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것은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이민자에게 나랏말싸미 듕귁에 블라블라, 를 가져다 대는 꼴이나 매한가지였다. 시험이니까, 울면서 그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씬 대사를 달달 외웠었다. 누가 어디서 셰익스피어 이름만 입에 올려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었으나… 정말이지 그거야말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고, 덕분에 나는 적어도 영어원서에는 경기를 일으키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영어를 잘하기 위한 비법, 영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신묘한 기술 같은 것을 찾아서 이 책을 펼친다면 정말 번지수 잘못 찾은 것이다. 그저 영어를 옆에 가까이 두고자 한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가 궁금해서, 도대체 그런 사람에게 영어란 어떤 의미인가가 알고 싶어서라면 맞게 찾아왔다. 즐겁게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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