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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26. 2024

삶의 한 순간을 떠낸 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외, 천천히, 스미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엔 수필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배웠다. 경수필, 중수필. 지금은 그냥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다 묶는 것 같다. 분류는 간편해졌는데, 어쩐지 수필이라는 글의 성격은 더 종잡을 수가 없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에세이가 도대체 어떤 글인가, 를 고민하는 와중에 마침 새로 읽기 시작한 책에 재미있는 대목이 출현해서 인용하겠다. 


이런 글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글 이름이 무려 에세이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글. 형식, 스타일, 표면적 짜임새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이로써 사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글. 감정의 차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글. 이런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주장 또는 서사라는 물길들과 글자라는 섬들이 한데 모여 한 편의 작품 혹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다도해가 된다. -「에세이즘」, 15쪽



오히려 수필 essay보다 산문 prose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고나 할까.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잘 쓴 산문에는 그 안에서도 기승전결을 느낄 수가 있다. 단순한 문장과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클라이막스를 향해 당겨지는 숨은 긴장감이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 놓아진다. 이런 글들을 찾아 묶었을 엮은이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좋은 산문집이다.      



천천히, 스미는 |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外 | 출판 봄날의책 | 발매 2016.09.20.



그러나 세상을 활기차게 했던 그 힘은 그대로 머물며 무관심하게 무감하게 그 무엇에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고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쩐지 그 힘은 건초빛 조그만 나방과 대비되었다. 무엇을 시도한들 소용없었다. 다가오는 운명에,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도시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까지 삼켜버릴 그 운명에 맞선 조그만 다리의 놀라운 투쟁을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20쪽      


누구에게나 닥쳐드는 당연한 삶의 종지부에 맞닥뜨려 최후의 저항을 보여주는 작은 나방 한 마리에게서 버지니아 울프는 그리스 비극에 비견될 만한 영웅적 움직임을 읽고      


이 보잘것없는 작은 나방이 그토록 거대한 힘에 맞서 자신 말고는 아무도 소중히 여기거나 간직하려 하지 않는 것을 지키기 위해 거인 같은 힘으로 저항하는 모습에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20쪽     


이렇게 감동하고 그 순간을 글로 적어 남겼다. 그로부터 무려 8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가 읽고도 그 찰나의 깨달음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개인적 경험에서 길어 올린 보편적 깨달음은 거칠 데 없이 누구에게나 가 닿게 마련이다.      

혹은 이런 글은 어떤가.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81쪽     


사람은 삶의 주기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거나 늦게,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는 문제이며 누적된 증거가 없는 탓이다.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이의 슬픔이 너무도 절망에 가까운 것은 젊의 무지 때문이다. -85쪽      


그러니 너무 크게 소리쳐 기뻐할 일도, 좌절해 쓰러져 절망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결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 삶은 다시 하강하거나 상승할 테니까. 그것이 인생의 리듬이고 주기일 테니까.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려내는 파장이 다른 누군가와 비슷하게 닮지 않았다고 해서 스트레스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일이 행여나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리돌림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요즘 세상에 일견 위험하게까지 보이는 주장을 하는 글을 읽는 일은 약간의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에게 무엇을 읽으라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쓸모없거나 해롭다. 문학을 감상하는 일은 기질의 문제이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파르나소스에 이르는 길에는 독본이 없으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울 가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읽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이다. 대학은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할지 알려주는 일을 대중교육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추천하고 싶다.      

사실,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할지 알려주는 일은 우리 시대에 대단히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많이 읽다 보니 감탄할 시간이 없고 너무 많이 쓰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없다. 누구든 현대 도서목록의 혼돈 속에서 ‘최악의 책 백 권’을 선정해서 발표한다면 젊은 세대에게 실질적이며 지속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232쪽      


아마 이런 문장을 가능한 한 안전하게 교정한다면 이렇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읽으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문학을 감상하는 일은 기질의 문제에 가깝지 가르침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의 글들이 일없이 길어지는 게 꼭 작가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이런저런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으니 뭐 어쩌겠는가.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산문들을 읽는 것은 탁 트인 풍광을 감상하는 것 같은 청량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적인 이 제목이, 삶에서 찍어낸 탁본 같은 이 글들을 전하고 싶어 하는 엮은이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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