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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29. 2024

일상의  틈바구니 어딘가에서,

고수리, 선명한 사랑

사고를 쳤다.     


오전에 급하게 치과를 가야 할 일이 생겼고, 그래서 모든 일정을 미루고 병원을 다녀왔고, 오전에 다니던 운동을 점심시간에 갔다. 거기까진 별 문제가 없었다. 귀갓길에 너무 허기가 져서 그랬나 아님 더워서 그랬나 그것도 아니면 딴생각에 푹 빠져 있어서 그랬나.     


뭐에 걸렸는지도 모르게 순간 발이 떴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그다음 든 생각은, *되기 전에 손목은 사수해야 한다(이미 요골 척골 모두 한 번씩 또가닥 한 전적이 있는 데다 지금 손목을 부러뜨렸다간 하반기 일정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고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무릎 하나로 모든 충격을 다 받아버린 뒤 통증에 혼미해진 상태로 한 바퀴 반을 굴렀다. 거짓말 같은데, 진짜다. 아니 액션 영화의 스턴트 씬에서나 보던 걸 이 나이에 구현하고 앉았을 일이냐고. 찢긴 무릎이 너무 아픈데 한편으로 너무 개쪽스럽고 심지어 이 무슨 근본 없는 일단 살고 보자 낙법을 구사한 것인가 싶어서 그대로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비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남은 참담한 현실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그 무엇보다도, 절뚝거리면서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와 긁힌 핸드폰을 수습한 뒤 평소라면 도보 7분 거리를 30분 걸려서라도 돌아가야 했다는 것… 마감을 지켜서 편집자님의 야근에서 내 지분을 삭제해야 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 미션 컴플리티드를 외친다. 뿌듯하군. 내 다리는 주인, 이 미친갱이야, 를 외치는 것 같지만 알 바 아니다. 장하다, 기특하다. 하지만 정말? 

     

한때 언제 어디서든 넘어지고야 마는 것이 나의 개인기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흉내 내려야 낼 수 없는 것이면(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다, 멍청아) 그게 나의 고유한 재주인 것처럼 갖다 붙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맹하게 살았던 시기의 내게는 삶의 모든 면면이 개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을 부려 쓴 글이 잘 쓴 글인 줄 알고 떠받드는 모자란 구석도 있었더랬다. 폼 잡는 것이 멋있는 것이고 똑똑한 것인 줄 알았던 시절(황당하게도 아직도 그런 버릇이 제법 남아 있다. 있는 줄은 아는데, 못된 버릇 없애기가 참 힘들다)이.     


작가들은 대체로 그들만의 특기가 있다. 특기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그럼 장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소설도, 논픽션 작가도, 에세이 작가도. 묘사를 기막히게 한다든가, 소재가 참신을 넘어서 너무 시대를 앞서간다든가(웃자고 한 말), 절로 공감하고 싶어지는 캐릭터 조형을 잘한다든가, 코믹한 문장을 잘 쓴다든가. 

여하간 잘 갈고닦으면 무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 소개하고 싶은 책의 작가는 사랑에 대해 참 잘 쓰는 분이다. 

자, 여기서의 사랑을 무슨 의미로 해석하시든 자유지만 아마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을 떠올린 분이 대다수이리라 짐작한다. 



선명한 사랑 | 저자 고수리 | 출판 유유히 | 발매 2023.11.10.


고수리 작가는 정확히 반대편에서 누구나의 삶에나 존재하는 사랑을 하나하나 펼쳐 쓴다. 너무나 사소하고, 평범하고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도 몰랐던 그런 일상의 사랑을. 클리셰적일 수 없도록 구체적이고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그게 무엇인지 아는 보편성을 획득한 사랑을 말한다.      


그래. 딸, 오늘도 잘하고. 아니, 잘하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해. 뭔가 나서서 일을 한다는 건 어려운 거야. 너도 힘들 수 있어, 수리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할 때는 최선을 다하고. 너무 지치게 일을 몰아붙이지 마라. 그럼 여유가 없단다. 그리고 딸, 공부해야 해. 공부할 준비를 언제나 해. 내 지식에 한계가 올 때가 있어. 그래서 자꾸 공부하라고 하는 거야. -106쪽     
아이를 ‘안아준다’였다가, 아이가 ‘안겨온다’. 그러고는 결국 아이를 ‘안아보았다’로 변해가는 걸까. 엄마에게 ‘안아준다’는 말은 이토록 아리게 바래버리고 마는 말인 걸까. -112쪽     
나는 그냥 너희랑 올려다보는 하늘을 가장 좋아해. 서안지안하늘색이라고 말하면 너무 싱거울까. 그런데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이란 너무나 단순하고 깨끗해서, 나는 그저 너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해.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좋아해. -157쪽     
만났던 사람과 헤어져 걸었다. 만난다는 건 뭉클하게 좋은 일이야. 주머니에 작고 달콤한 걸 채워 다녀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에게. 스치는 찰나지만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 같은 걸 평소에도 채워두어야지. -209쪽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짧은 글을 쓸 때마다 인용하는 몇 문장을 골라내는 일이 오늘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이렇게 좋은 문장을 여기에 옮겨 버리면 혹시라도 책을 사 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지 않을까 봐 아껴서 도로 묻어두고, 조금 덜 아까울 것 같은 문장을 골라보려 해도 그것이 쉽지 않아 몇 번을 뒤적거리기를 반복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에세이 작가가 있다는 것을 많은 분이 알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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