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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01. 2024

작가에게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최재봉, 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한 권의 책을 선택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고르는 걸까. 실물의 책을 고를 때와, 온라인 서점 혹은 독서블로그를 훑어볼 때 내가 한 권의 책에 이끌리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모든 것에 앞서 '본능적으로'라고 말하면 엄청나게 있어 보일 것 같긴 한데, 사실이 아니므로 기각. 


책의 물성을 마음껏 구석구석 탐색할 수 있는 경우의 고려요소 중에서도 제일 먼저 살펴보는 건 다음의 두 가지다. 만듦새와 표지에 사용한 지류. 까닭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호하는 종이가 있기 때문인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아무리 사고 싶은 책이어도 그 종이에 인쇄된 책이면 한 번 더 생각할 정도로(무지성적으로 책값을 지출하는 평소의 성향을 고려할 때 얼마나 무게감 있는 고려사항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듦새는 요즘이야 대체로 모든 출판사가 평균 이상을 하니, 아주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거르기 위한 안전장치 정도의 역할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파르륵 넘겨보는데 그 찰나에 오타가 3개 이상 걸리면, '...' 대략 이런 느낌이랄까. "끌고 가." 

 

이 모든 것이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저자의 이름이 (내게는) 보증수표일 때. 덮어놓고 사랑하는 출판사(혹은 임프린트) 일 때. 그리고 무작정 펼친 페이지에서, 나를 크게 감정적으로 건드렸을 때.



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 저자 최재봉 | 출판 비채 | 발매 2024.03.06.



이 책은 이중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 덕분에 손에 들게 되었다. 그 조건 중 하나는 바로 '미친 듯이 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웃겼느냐, 그 대목을 인용하겠다. 


자신이 처음 생각한 제목은 '하얼빈에서 만나자'라는 것이었다고. 그 제목이 어쩐지 트로트 가사 같아서 단출하게 '하얼빈'으로 줄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칼의 노래》의 원제(?)인 '광화문 그 사내'도 주현미의 노래 '신사동 그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는 후문을 생각해 보면, 평소 트로트를 즐겨 듣는 김훈에게 모종의 '뽕끼'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10쪽


나는 이 얘기가 너무 웃겨서 고딩 자매들에게까지 떠벌렸는데,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광화문 그 사내', 훨씬 직관적이고 좋은데? 


여하간.


그러고 보니 책 제목조차 말하지 않았... 최재봉의 「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라는 제목의 평론집이다. 한데 나는 본격 평론집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쓴다는 일'에 관련된 연상 가능한 이슈들과 거기서 떠오르는 작품들을 함께 엮어 소개하고 김에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함께 끼워 쓴 글처럼 읽혔다. 그게 나쁘다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덕분에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목차가 굉장히 흥미로워서 소개해 보려 한다. 


PART 1 문장은 그것을 쓴 사람을 드러내고, 그것이 읽히는 사회를 비춘다


제목 ∥ ‘총의 노래’가 될 뻔했던 ‘하얼빈’ 9

문장 ∥ 독자를 사로잡는 첫 문장의 비밀 24

생활 ∥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35

작업실 ∥ 그것이 어디든 작가가 있는 곳이면 43

마감 ∥ 작가의 호흡이자 숙명 55

퇴고 ∥ 아침에 쉼표 하나를 들어냈고, 오후에는 그것을 되살렸다 64



PART 2 문학이 위기라는 아우성 속에서


독법 ∥ 다르게 읽기를 권함 79

문단 ∥ 순혈주의 또는 ‘그림자 문화’ 87

해설 ∥ 친절인가 간섭인가 97

문학상 ∥ 영광과 굴레 사이에서 107

표절 ∥ 누군들 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119



PART 3 초월하거나 도피하거나


첫사랑 ∥ 별 하나가 이 어깨에 기대어 잠든 것이라고 133

모험 ∥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142

똥 ∥ 인간은 먹은 만큼 배설해야 한다 153

복수 ∥ 복수는 문학의 힘 166

술 ∥ 초월 혹은 도피 178

팬데믹 ∥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187

유토피아 ∥ 천국과 지옥 사이 200



PART 4 우리는 모두 절대자의 피조물 혹은 연극 무대의 배우가 아닌가


작중인물 ∥ 피조물의 독립선언 213

우정 ∥ 가까운 이의 재능은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223

부캐 ∥ 문학이라는 ‘부캐 놀이’ 235

독자 ∥ 후원자인가 하면 독재자인 244

편집자 ∥ 퍼킨스라는 환상, 리시라는 악몽 252

사라진 원고 ∥ 원고는 불에 타지 않는다! 263


앞서 작가의 '쓴다는 일'에 관련된 연상 가능한 이슈들과 거기서 떠오르는 작품들을 함께 엮어 소개한 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런 책이 이전에도 없지 않았겠지만 이 책의 다른 점이라면 아마도 오랜 기간 문학기자로 일해왔던 저자만이 알고 있었던 문학계의 뒷이야기랄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을 함께 풀어내고 있다는 데 있겠다. 업계에서 기나긴 시간을 살아와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아온 사람만이 삭히고 둥글려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들. 그러니 좋은 이야기만 있지는 않다는 점도 유념하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듯, 사람들이 부대끼며 일하는 곳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2022년 4월 이웃 나라 일본에 문을 연 '원고 집필 카페'는 바로 마감이 강제하는 창의력에 기댄 공간이다. 이 카페는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입장할 때 접수처에 그날 써야 할 원고 양과 마감 시각을 적어내야 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 시간마다 찾아와서 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손님이 사전에 선택한 강도에 따라 마감을 독려하거나 다그치거나 한다. -61쪽


집사 카페도 들어온 마당에 이 카페는 왜 안 들어올까...


발문은 해설과도 다르고 추천사와도 다르며,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를 결합한 형식의 글이라 할 수 있다. 발문의 존재 이유는 책 저자의 사람됨과 인간적˙문학적 이력, 저자와 발문 필자의 관계 등을 친근하고 재미있게 밝혀두어 독자가 본문 수록 작품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가교 구실을 하는 데 있다. -103쪽
해당 작가의 풍모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하고 그 작가가 친근하게 느껴지며 작품의 비밀에 접근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쓰는 이나 읽는 이나 부담스럽기만 한 해설과는 맛이 다르다. 그래서 제안한다. 신작 시집이나 소설책에 꼭 무언가를 넣어야겠거든 앞으로는 해설 대신 발문이 어떻겠는가. -106쪽


독자 1인의 입장에서 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 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보아야 아니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 대가리를 떡 꺼내어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 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이상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작을 연재하다가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풍에 대한 독자의 항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결국 연재를 중단하며 쓴 <<오감도>작자의 말> 일부다. -265쪽


이상 시인의 울분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런 통렬한 작자의 말을 남겨도 괜찮았던 것일까를 뒷북치는 심정으로 걱정하다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작가들이 세상에 한 줌 남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조금밖에 남지 않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때이니까. 모두가 쓰고(말하고) 싶어 하는데, 그만큼 읽고(듣고) 싶어 하지는 않는 그런 시대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의 부피만큼만 타인의 이야기에게 틈을 내어주는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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