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선 계단을 오르며(13)
너무 과하게 감정을 건드리지도 않게, 너무 정감 없지도 않게. 함께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정도의 다정함으로. 김은지가 제 감정을 추스르듯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몇 번 쓸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나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의 최대치로 힘든 일을 겪는 법이라는 말 여러 번 들었는데요… 사실 위로가 별로 안 됐어요. 근데 여기서 뭘 생각했냐면, 흙을 주물거리다 보니까요.”
“네에.”
“신기했어요. 딱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큼의 흙을 쥐고 꾹꾹 누르다가 어떤 모양을 만들고, 그다음에 또 내가 쥘 수 있는 만큼만 쥐어서 또 밀고 누르고… 그러다 보면 뭐가 하나 만들어지고 그런 과정을 계속 겪다 보니까요.”
손짓으로 흙가래를 밀고 쌓아 올리며 모양을 다듬는 흉내를 내며 말을 이어가던 김은지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맴돌았다.
“하나씩 조그맣게 떼어서 손에 들어보면 생각한 것보다 되게 큰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씩 해결해 나가도 늦어서 큰일 날 일은 아니겠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김은지의 토로를 듣던 최현욱은 문득 오랫동안 밟아왔던 연주자의 길에서 벽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와 비슷하게, 그저 손안에 작은 흙덩어리를 쥐고 손을 펼쳤다 오므렸다 하며 공황 상태에 빠졌던 감각이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맛봤던 예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반복적인 동작 안에서 형태를 달리하는 흙덩어리가 아주 미약한 안도감,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되돌려주었던 그 순간을.
“그런 계기를 만들어 드렸다니 제가 더 감사하네요. 이런 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네요. 혹시 더 하고 싶으신 말씀은…?”
김은지가 한층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기분을 잊지 않으려고요. 그럼 뭘 하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은지쌤! 진짜 좋은 얘기였어요, 너무 좋아요.”
“그러게요. 그럼 진우 얘기도 들어봐야죠.”
최현욱이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훨씬 격의 없이 진우를 쿡 찌르며 장난스레 말했다. 처음에 비하면야 놀라울 정도로 명랑해졌어도 이진우는 이진우인지라 제 뒷덜미를 벅벅 긁적이기만 했다.
“왜 말 안 하는데-” 이로미가 보채자 눈에 띄게 당황한 이진우가 말을 더듬었다.
“마, 마,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얘기는 이제 다 아시는데 굳이 뭘 다시 말하나 싶어서… 요?”
“다 알아도 본인이 정리해서 얘기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한 번 얘기해 보자, 진우.”
최현욱이 완곡하게 권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진우도 더는 거부하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단은… 그냥 별 대단한 거 아니어도,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면 진짜 의미가 되는구나…랄까? 그런 게 있었는데.”
이진우는 얼버무리듯 말하다 아무도 제가 말하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더 열띠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사실 이걸 껴안는다는데는 뭐 그렇게 특별한 뜻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행위에 모두가 공감하는 특별한 의미가 없더라도,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윤소은의 간결한 정리에 이진우가 고마운 눈빛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거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무슨 의미를 담겠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특별한 의미가 생길 수 있다 싶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여기에 각자의 힘들었던 시기를 담기를 바라셨던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힘들었었지만 이제 그건 지나갔다고, 달래주고 위로하는 의미로 안아주라고 한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최현욱이 바로 무어라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마련한 것에 비해 과분한 보답이었다. 이진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 같기도 했어요. 그거 뭐지. 아, 상징적으로요. 없지만 있는 마침표를 찍은 거죠.”
제가 한 말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이진우가 뿌듯한 얼굴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모두가 한 마디씩 했으니 이제 이 수업을 이끌어왔던 최현욱이 뭐라고 한 마디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럼에도 쉽게 울렁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막연히 이런 걸 해보면 좋지 않을까, 남다르게 느끼시는 게 분명히 다들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어요. 여러분 모두 다 세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시고 계시니까요.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아마 다 여러분의 개성으로 녹아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 걸 받아들일 수는 없고, 하지만 딱히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이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이 누구나 있는데…”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